“마음도 세수하듯 씻어내야…전국민 선명상 모범도량 돼야죠”
이승현 조계사 제27대 신도회장(인팩코리아 대표이사) ‘삼성TV 세계 1등 주역’ 훈장 달고 성공 가도 달렸지만 과감하게 사직 해인사 108배 눈물 쏟자 오히려 개운 1년 동안 매일 새벽 3시 일어나 정진 사찰 주는 편안함 대체할 수 없는 가치 조계사 성역화에 총력 기울이는 이유 “37대 집행부 선명상 보급 적극 동참 국민 정신건강의 모범도량 되겠다”
왜 해인사였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연차를 냈다. 생애 첫 평일에 낸 휴가였다. 2005년 아내와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이유는 없었다. 가본 적도 없었다. 마음이 끌렸다. 차를 타고 무작정 출발했다. 해인사에 도착해 대적광전에서 108배를 했다. 절하는 법도 몰랐다. 곁눈질하며 따라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60배가 넘어가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오듯 땀이 쏟아졌다. 얼굴에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108배를 마칠 때쯤 엉엉 울음이 터졌다.
이승현 서울 조계사 신도회장(65·인팩코리아 대표이사)은 “창피하단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 법당에 부처님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작 108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세계 1등 티비의 주역이라며 잘난 척 해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의 맛에 취해 교만에 빠진 자신을 마주하자 마음 깊은 곳 똘똘 뭉쳐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삼성TV가 세계 1위를 한 시점이었다. 그는 10년간 일본 주재원으로 근무하며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자상거래 방식으로 LCD액정모니터 시장을 선도했고 ‘전자제품 왕국’이었던 일본시장에서 무명의 삼성TV를 베스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귀국해 삼성 LCD TV 사업부 조직건설을 건의했고 PM그룹장을 맡았다. 삼성TV 세계 1등의 주역이자 ‘삼성전자 최초 LCD TV를 만들어 판매한 사람’이라는 타이틀도 생겼다. 세계 시장에서 삼성 LCD TV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에게 다가온 것은 의외로 초발심과 하심이었다.
가야산을 나와 지리산으로 향했다. 하동 금봉암으로 가는 길, 섬진강 하구를 지나 구불구불한 국도를 지나는데 마음이 탁 트였다. 막혔던 속이 뻥 뚫렸다. 운전하는 손이 흔들릴 정도였다. 지리산 중턱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왜 그러냐”며 걱정스럽게 묻는 아내에게 답했다. “모르겠어. 가슴이 확 뚫리는 것 같아.” 길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맑은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댔다. 그렇게 찾은 금봉암에서 새벽 예불을 하며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스님은 그에게 예불문과 경전을 건넸다. “법당에서 한 것처럼 앞으로도 집에서 정진해보라”고 권했다.
집 한 켠에 작은 기도 공간을 마련했다. 1년 동안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문부터 독송, 정근, 사경, 108배까지 꼬박 2시간을 정진했다. 주위 사람들은 ‘얼굴이 달라졌다’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조언을 구하는 이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일단 108배를 해봐. 종교랑 상관없이 분명 느끼는게 있을 거야.”
해인사를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을 그만뒀다. 물론 퇴사 이후 플랜은 없었다. 안정적인 생활을 접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빠지지 않고 1년간 정진해온 힘은 어느 순간 그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 있었다.
2006년 일본항공전자 한국법인 대표를 거쳐, 2007년 대만전자 부품회사 인팩코리아 공동 창업자 겸 대표가 됐다. 1998년 6월 설립돼 GPS안테나 세계점유율 1위 기업 인팩의 한국법인이다. 스마트폰, 디지털TV, 자동차의 초소형 핵심부품을 제조판매한다. 품질관리에 엄격하고 까다롭다고 소문난 삼성전자, LG전자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의 제27대 신도회장으로 활동중이다. 1월 10일 조계사에서 고불식을 봉행하고 총본산 성역화 불사에 1억을 쾌척하며 통 큰 기부로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조계사가 세계 최고의 도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찰을 중창하고 전각을 중수하는 불사(佛事)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건물만 지어댄다”는 비아냥도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사찰공간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은 사회의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가치다. 사찰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국민이 다수다. 이 때 넉넉함과 포근함은 덤이다. 병원도, 약국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어쩌면 사찰이 해결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확신한다.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 기업인이기 때문에 갈등비용 절감이라고 봅니다. 사회에 갈등이 많다는 것은 곧 망하는 길이거든요. 그로 인해 소비되는 비용도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사찰이 주는 편안함으로 국민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이는 엄청난 이익이죠.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도 굉장한 생산성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엄청난 이득을 발견했던 사왓티의 거상 수닷타 장자처럼 그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사회에 안겨줄 엄청난 이득을 알아본 것이다. 특히 새벽 3시만 되면 전국 방방곳곳 사찰이 일제히 예불을 올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불을 통해 스님들은 무명(無明)의 영가를 천도하고 국태민안을 바란다. 지구에서 자그마한 국가가 명맥을 유지해온 이유에는 분명 이런 기운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개똥철학이긴 합니다만(웃음), 우주가 원자로 이뤄져 있잖아요. 나라와 국민의 평안을 발원하는 스님들의 진심을 에너지로 해석하면 사실 전혀 없는 것이라곤 할 수 없죠. 울림이 있잖아요.”
조계종 37대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추진하는 국민정신건강 증진의 ‘선(禪)명상’ 보급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3월 17일 출가재일(음력 2월 8일)에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조계사에서 ‘선명상으로 찾는 마음의 평안'을 주제로 설하는 법문을 들었습니다. 핵심은 분별심을 최소화하는 것 같더라고요. 인간이니 화도 나고, 의심도 하고, 질투도 나잖아요. 그 마음의 근원은 분별에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고락인과(苦樂因果)에 대한 진우 스님의 설명도 덧붙였다. “즐거움이 있으니까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고, 좋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이 따르게 돼 있어 총량은 똑같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크게 슬퍼할 일도, 기뻐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 좀 밋밋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10년간 주재원으로 지내면서 지켜본 일본인의 삶이 꼭 그래요.”
오사카에서 근무하던 주재원 시절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1995년 1월 17일 새벽, 그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겪었다. 규모 7.3, 진도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지진 사상 두 번째로 강력했던 대지진이었다. 잠을 자던 중 거친 진동을 느꼈고 일어나 보니 영화처럼 집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재해 현장에서 마주한 일본인들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비명도, 통곡도 없었다. 그들이 무감각해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체화된 생활방식이었다. 감정을 억누르지도, 따라가지도 않는 이런 침착함이 어쩌면 부처님 가르침의 일상화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소니(SONY) 등 일본의 주요 기업인을 만나 “어디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느냐” “중요한 의사결정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언제나 명상을 권했다.
그도 아침마다 최소 3분 명상을 한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더라도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가부좌를 튼다. 명상을 ‘세수’로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듯 마음도 씻어내야 한다고. “마음의 때를 알아내는 방법은 정진에 있습니다. 불경을 외우거나 명상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생각들이 수시로 떠올라요.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면서도 순간 다른 생각으로 빠져있죠. 그 잡념이 바로 마음의 때입니다.”
불교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래서 종교의 틀에만 넣긴 아깝다. 이 회장은 이 거울이 개인을 넘어 사회를, 사회를 넘어 대한민국과 세계를 환히 비추기를 발원한다. 사찰에서의 수행 경험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됐듯, 조계사를 찾은 사람들의 마음이 청량해지길 돕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총본산 성역화 불사로 어린이부터 청년, 중년, 장년 모두가 쉬어가는 도량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보살(여성불자)을 넘어 거사(남성 불자)의 활동 영역까지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자식과 남편 기도는 어머니나 아내의 몫이라는 생각이 많죠. 그러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것이에요. 스님도 아내도 제 기도를 하면서 저만큼 간절할 순 없습니다. 본인이 하는 건 100% 본인에게 와요. 누가 해주면 좋지만 스스로 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죠. 세수를 스스로 하지, 남이 해줍니까?(웃음)”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