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초월 스님 태극기와 오세훈 시장 태극기
오 시장은 광화문 광장 대형 태극기 게양대 건립보다 공감대 형성된 진관사 태극기 선양에 나서야
“두 가지 제안하고 싶습니다. 초월 스님의 서훈 등급 상향이 시급합니다. 다른 하나는 민족 상징인 태극기 정신을 기릴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6월 23일 진관사의 초월 스님 순국 80주기 다례재 현장에서 나온 김광식 전 동국대 특임교수의 일성은 초월 스님과 태극기가 지닌 의미를 되짚게 하는 울림이 있었다.
김 교수의 지적에 일리도 있었다. 초월 스님(1878~1944)은 용성(1864~1940)·만해(1879~1944) 스님과 함께 3대 독립운동가로 꼽히지만, 용성·만해 스님이 각각 건국훈장 대통령장 2등급, 대한민국장 1등급으로 추서된 데 비해 초월 스님은 애국장(4등급)에 불과하다.
초월 스님은 1944년 청주 교도소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해인사(1908)·범어사(1909)·통도사(1912) 등 전국 각처 강원을 순방하며 후학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애국지사다. 1919년 3·1운동 직후 통도사 구하 스님(1872~1965)에게 독립자금을 인수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비밀결사체 일심교를 창설해 혁신공보 제작, 승려독립선언서 배포했다. 그러다 1939년 용산역에서 중국 봉천역으로 가는 화물 열차에 ‘대한독립만세' 등 문구가 백묵으로 기재된 사건이 발생하고 초월 스님이 그 배후로 지목돼 수감됐다.
초월 스님의 저항 정신은 2009년 5월 붕괴 직전의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던 중 발견된 태극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낡은 태극기의 한쪽 귀퉁이는 불에 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총알에 찢긴 듯한 구멍들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가늠케 했다.
특히 태극기를 감싼 보자기 안에서는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이듬해까지 서울의 독립운동 조직과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간행한 ‘신대한’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독립신문’ 등 항일 지하 신문과 희귀 독립운동 사료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대부분 실물이 처음 확인되는 것들이어서 주목 받았다.
이 태극기로 인해 진관사가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본부로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초월 스님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선명하게 알려졌다. 더구나 6·25전쟁 중 진관사 건물은 대부분 불탔으나 칠성각을 비롯한 3채(나한전·산신각)만 남았고, 아슬하게 남은 전각 한곳에서 3·1운동 태극기가 발견됐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례재를 다녀온 이틀 뒤인 6월 25일, 세상이 다시 ‘태극기’로 떠들썩했다. 공교롭게도 또 오세훈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국가상징공간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110억원을 들여 서울 광화문광장에 높이 100m가 넘는 ‘대형 태극기’를 게양대를 건립하겠다고 했다.
오 시장의 발표 후 시민단체들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라고 즉각 비판했다. 특히 게양대의 완공시점이 2026년 2월이라는 점에서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오 시장의 정치적 계산이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더해졌다. 2026년 2월 광화문광장에 태극기 조형물이 세워진다면 ‘국가 상징물’이기에 앞서 건립을 주도한 자의 철학과 결단을 상기시키는 특정 단체의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지난 2월부터 이어져온 송현공원의 이승만 기념관 건립처럼 오 시장은 여론이 수렴되지 않은 정책으로 불필요한 논란만 계속 조장하는 모양새다.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태극기를 지켜냈던 초월 스님이 본다면 크게 통탄할 일이다. 오 시장은 진관사 태극기처럼 역사적 공감대가 명확한 ‘국가 상징물’을 발굴하고 그 정신을 기릴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전문가들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