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보여준 보살의 삶, 그 궤적따라 보살행 실천해야죠”
홍현숙(무상성) 보살 선묵혜자 스님 네팔 룸비니 평화의 종 불사에 통 큰 보시 친구따라 남해 보리암서 철야기도하며 불교 인연 맺어 쿠시나가르 찾아 가사 공양 올려…전국 전각·불상 불사도
2023년 11월 28일,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한국의 종 타종 및 종각 낙성식’이 진행됐다. 도안사 주지 및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선묵혜자 스님을 비롯해 네팔 정관계 인사, 한국 불자 160여명이 함께했다. 이들은 새로 조성한 범종을 타종하기 위해 종각에 올랐고,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힘차게 당목을 당겼다. 이윽고 대지를 깨우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겼다. 타종식이 마무리된 후 남몰래 눈가를 훔치던 이가 있었다. 종 불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홍현숙(무상성) 보살이다.
홍 보살은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원으로 선묵혜자 스님과는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회원으로서 스님과 함께 순례하고 기도를 올리며, 평화를 향한 걸음에 동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딘가에 얽매여 활동하기 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수행 정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일까. 2018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금강경’ 독송정진에서 스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스님이 네팔에서 불사를 진행 중이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기사를 통해 알고 있던 터였다. 순간 마음이 동했다. 스님의 원력이 한없이 거룩하게 와 닿았다. 세계 평화를 위한 종 불사가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니 마치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인 듯했다. 그리고 바로 불사의 원만회향을 기원하며 선뜻 불사기금을 전달했다. 홍 보살의 통 큰 보시에 종은 예상보다 빠른 8개월만에 제작이 완료됐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웠다. 코로나19라는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지난해 11월, 불사는 회향했다. 홍 보살 등 수많은 마음이 모여 부처님 탄생성지에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항상 세계 평화, 불국정토를 발원하며 기도를 해왔는데 회향한 기분이었습니다. 염원이 담긴 종이 부처님 탄생지에 조성이 됐잖아요. 그때가 70세였고, 딱 제 생일인 달이었는데.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겠습니까. 그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느꼈죠.”
부처님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나선지 30년을 훌쩍 넘어섰다. 지금은 이렇듯 신심 깊은 불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불연은 쉬이 닿지 않았다. 신심 깊은 불자 집안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불교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의 본분에 충실했다. 대학에서도 학업에만 집중했다. 졸업을 했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아이들을 낳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다보니 여유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한 명이 대뜸 남해 보리암으로 철야기도를 가자고 했다. 사찰은 가본적이 없었고 보리암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불교를 모르는데 철야기도를 알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났다. 남편이 말렸지만 마음이 가는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보리암은 낯설지 않았다. 도량에 들어선 마음이 평온해졌다. 분명 처음왔음에도 고향 집 마냥 편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대웅전 법당은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보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절은 해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몸이 알아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기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을 향해 갔고, 하나둘 법당을 빠져나갔다. 철야기도가 끝날 무렵 자리를 지킨 건 홍 보살과 스님을 포함해 3명 남짓이었다.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며 끝도 없이 절을 하는데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30년 전 일인데도 그 순간이 생생해요.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죠. 불교가 뭐고, 기도가 뭘까 하고요.”
불교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을 다니며 경전수업은 물론이고 스님의 법문도 빼놓지 않고 경청하며 불교적 소양을 길렀다. 이후 집 근처 선원으로 옮기면서 홍 보살의 30년 기도 정진이 시작됐다.
처음엔 21일 기도부터 시작했다. 보리암의 기억을 안고 절을 했지만 웬걸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술까지 터질 정도였다. 이를 악물었다.
“기도 마지막 날 꿈에 조사스님들이 나타나 함께 합장을 했어요. 그러더니 강한 마음자리가 생겼죠. 1000일 기도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부처님 전에 ‘이제 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겠다’며 절을 올렸습니다. 보름 내내 참회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내이자 엄마이기에 기도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잠을 줄였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선원서 기도를 올리고, 집안일을 하고 다시 선원을 찾았다. 이렇게 매일 꼬박 7시간씩 정진했다. 10년간 주변과도 연락을 끊고,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일심으로 기도하니 신심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났다. 출가하고 싶다는 열망도 꿈틀거렸다.
수행을 하면서도 절대 책을 놓지 않았다. 때론 꿈 속에서 스님들이 선법문을 했고, 잠에서 깨면 노트에 그 내용을 받아적기도 했다. 궁금증이 생기면 백방으로 선지식을 찾아 답을 구했다. 큰스님들의 법문이 진행되는 곳이면 마다않고 찾아갔다. 그러던 중 백양사 전 방장 수산 스님과 연이 닿았고, 무상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불자의 본분을 잊지 않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보살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서원한 그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스님들이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대중 공양을 비롯해 승복과 필요한 것들을 수시로 공양 올렸다. 꼬박 15년이었다. 홍 보살은 “나타나지는 않는데 계속 공양을 올리니 한 번 찾아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한터라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제 얘기를 들은 서옹 스님이 그 자리에서 ‘수처작주’(隨處作主) 글씨를 써서 스님 편에 보내주셨다. 정말 환희심이 났다”고 말했다.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상을 내지도 않았다. 응당 불자라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옷 한 벌 값이면 선방에 대중공양을 할 수 있겠다 싶었고, 자신보단 남을 위한, 불교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남을 위해 베푸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홍 보살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공덕을 쌓는 계기라 생각하며 사찰 전각 불사, 불상 조성 등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해나갔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닮아가겠다고 말하는 보살들도 적지 않았다. 불심깊은 불자들로 구성된 ‘팔정도 모임’을 만들어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렇듯 홍 보살이 불교계 일이라면 적극 나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정치인이자 불교인이었던 아버지는 그녀의 롤모델이자 스승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청렴결백함을 잃지 않으려 했고, 경기도의회 의장으로서 중도를 지키고자 했다. 매일 일에 치여 살면서도 아침마다 향을 정성껏 사르고 ‘금강경’ 독송을 잊지 않았다. 용주사 신도회장을 맡아 수 십년간 교구 신도회를 이끌며 지역 불교발전에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찰에서 행정지원이 필요하다 하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항상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었고 “이게 보살의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고 말했다. 어린 그녀는 당시 이해를 못했지만 불교를 공부한 뒤로는 아버지의 모습이 계속 겹치면서 알게됐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딸인 홍현숙 보살이 그대로 밟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들도 용주사, 월정사에서 아버지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몸이 급하게 안좋아지시면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저를 불러 나옹선사의 선시 ‘청산가’를 건내셨어요. 그러고 세연을 접으셨죠. 그날부터 기도에 들어가기 전 청산가를 외며 마음을 잡곤 합니다.”
불교TV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던 중 충격적인 영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처님 탄생 성지에 허름한 천막 하나 쳐져 있고 그 아래 먼지투성이 담요를 덮고 계신 부처님을 본 것이다. 통곡했다. 그 자리에서 발원을 하나 세웠다. ‘부처님이 머무실 수 있는 도량을 일구고, 깨끗한 가사를 올리겠습니다.’
인연이 찾아왔다. 인도 성지순례 동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겠다 싶어 스님에게 말해 4벌의 가사를 준비했다. 녹야원, 영축산, 마하보디대탑, 쿠시나가르까지 참배하고 가사를 올렸다. 쿠시나가르에서는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직접 부처님께 가사를 입혀드리기도 했다. 감동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후에 스리랑카, 베트남, 미얀마 등 불교국가 성지순례를 이어갔다. 선묵혜자 스님이 세운 108선혜학교에도 교복, 우물, 식판 등과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것들 지원하고 있다. 네팔 불교학교에서 준비 중인 선묵혜자 스님의 책 ‘발길 닿는 곳곳마나 평화의 불 수놓다’ 영문판 작업을 위해 아낌없이 보시하며 스님의 거룩한 구도행이, 부처님 진리가 널리 전달되길 바랐다.
“우리나라 불사에만 적극 참여해왔는데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부처님 나라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도 보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팔 불교대학 부총장이 스님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 글로벌하게 불법을 전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출판에 사용하라며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성치 않은 무릎으로 오랜시간 기도 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집에 기도방을 마련했다. 그동안의 공부를 돌이켜보면 자력으로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수월관음도와 아미타부처님을 모셨다.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나 다름없이 매일 정진 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초부터 세계 평화와 전쟁 종식을 기원하며 1만일 기도에 들어갔다.
“30년 넘게 불자로서 ‘수처작주’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고, 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허망하다는 가르침을 놓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머문 바 없이 집착하지 않고 기쁜 마음 그대로 보살행을 실천하며 살겁니다.”
김민아 기자 kkkma@beopbo.com
[1737호 / 2024년 7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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