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선원 선원장 일묵 스님

“팔정도 중 첫 번째 덕목인 정견이 모든 수행의 시작입니다” 감각적 쾌락과 자기학대의 고행 넘어선 불교 수행이 바로 중도 바른 견해 가져야 바른 수행으로 이어지며 바른 깨달음도 가능 지혜는 사성제의 네가지 진리를 확실히 알고 실천하는데 있어    

2024-08-09     주영미 기자
7월 20일 제따와나선원 선원장 일묵 스님이 부산 범어사 선문화관 대강당에서 ‘부처님의 바른 길, 중도'를 주제로 강의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설하신 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팔정도를 왜 ‘중도(中道)’라고 이름 붙였을까요. 

부처님의 최초 법문을 ‘중도대선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라는 부처님께서 최초 설한 법문이라고 알려진 ‘초전법륜경’에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보면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나 욕망을 탐닉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출가 뒤 고행을 시작합니다. 왕자 시절엔 지나치게 쾌락적이었고 출가 뒤 시작한 고행은 사실상 자기학대였습니다. 또 외도에게서 배운 삼매도 있는데 이는 그냥 삼매에 안주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쳤을 때 부처님은 출가 전 어릴 때 홀로 경험했던 ‘초선정’을 떠올렸습니다. ‘초선정’은 감각적 욕망에서도 스스로를 학대하는 고행에서도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어릴 때 경험했던 그 선정을 기반으로 깨달음에 이르셨기 때문에 ‘중도’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가 정견, 즉 바른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윤회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통찰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며 윤회하였다.” 

경전에 자주 나오는 구절입니다.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사성제(四聖諦)를 말합니다. 따라서 지혜는 사성제를 통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바로보는 바른 눈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성제를 통찰하는 방법으로 부처님은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팔정도의 첫번째가 바로 정견, 즉 바른 지혜입니다. 수행은 견해를 바꾸는 것, 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견해는 무엇일까요. 과거부터 반복된 생각들은 하나의 틀로 만들어집니다. 그 틀을 견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아라고 착각합니다. 욕심을 쫓아가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고, 욕심을 놓는 걸 오히려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도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몸을 교정하는 곳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일 많이 오는 부류가 요가 선생님입니다. 바른 자세를 알려주신다는 분들이 오히려 치료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세가 비틀어져 있는 상태에서 운동하다가 삐뚤어진 자세를 오히려 더 강화했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긴 겁니다. 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견해를 가진 채 나름대로 수행한다고 자기식으로 하다 보면 비틀어진 몸으로 요가를 하는 것처럼 비틀어진 마음을 더 강화합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첫 번째 덕목으로 바른 견해를 제시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무상한 것으로 보라. 괴로움으로 보라. 무아로 보라. 그리고 감각적 욕망이나 탐욕이나 성냄은 해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으로 인해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성냄을 내려놓는 게 유익하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만약 욕망을 얻는 게 행복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되면 점점 욕망을 키우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수행이 오히려 욕망을 키우니, 수행할수록 괴로움은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집착이 일어난다고 본 겁니다. 이를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원인을 어리석음, 무명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갈애를 놓는 수행입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무기가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중도를 수행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지혜는 사성제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하자면 ‘사성제를 이해하고 지혜를 통해서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를 개발하는 무기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 삼매입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야 하는 겁니다. 바른 삼매를 개발한 다음 그 삼매의 힘을 이용해서 진리를 통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컵은 여러분에게 ‘너 괴로워해’ ‘너 싫어해’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것을 보고 괴롭다고 이야기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분별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보고 미워한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나 미워해 줘’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대상에게 좋고 싫음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을 좋고 싫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상태로 가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뿌리로 일어나는 마음은 버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불선(不善)입니다.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은 선(善)입니다. 이렇게 마음 상태를 구분할 줄 알아야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산에 갔을 때 독초를 구분해야 먹지 않는 것처럼, 이 마음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수행이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부처님처럼 오랜 세월 수행해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불법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배운 다음에 수행을 통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혜에도 문사수(聞思修)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듣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법문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를 숙고해보고 ‘이 길이 바른 길이다’라는 확신이 생기면 직접 수행을 통해서 닦아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과정이 우선입니다. 배워서 깊이 사유해 보는 것이 정견, 정사유에 해당합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성제(苦聖諦)입니다. 세상은 그대로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고 또한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다. 이것이 우리가 철저히 통찰해야 할 진리입니다. 조건 지어 생겨난 것은 결국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를 바로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다고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집성제(集聖諦)는 괴로움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버려야 할 진리입니다. 집성제가 버려지면 괴로움이 소멸되고 열반이 실현됩니다. 멸성제(滅聖諦)는 실현해야 할 진리입니다. 도성제(道聖諦)는 닦아야 할 진리입니다. 

도성제를 닦으면 고성제를 철저히 알게 되고, 고성제를 철저히 알면 집성제가 버려지게 되고, 집성제가 버려지면 멸성제가 실현되는 것이 사성제의 구조입니다. 그런 전체 구조를 이해한 다음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 근육운동을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수행한다는 사람 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수행한다면서 오히려 신비주의에 빠지고, 이상하게 되는 경우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렇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그런 위험성이 없어집니다.

사성제 법문을 듣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바른 견해를 갖출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를 듣고 숙고한 다음에 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정진해야 해야 합니다. 정진은 수행의 방편을 하나 들고 그 방편에 따라 수행하다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번뇌가 일어나면 그 번뇌를 알아차리고 놓으면서 수행과 일념이 되는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바른 기억들로 최적화된 방법들이 쌓이고 내려놓는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서 선정, 바른 삼매로 가게 됩니다. 그 선정의 힘을 이용해서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알고, 선정을 지혜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선정을 넘어 자기를 관찰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반조(返照)’라고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흔히 팔정도 다음에는 십정도(十正道)라는 말을 합니다. 아라한은 십정도라고 합니다. 바른 삼매가 무르익었을 때 그 삼매를 통해서 마지막에 깨달음의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이 진짜 바른 지혜라는 말입니다. 처음 바른 견해는 부처님께서 알려준 견해였다면 삼매를 통한 지혜는 자기가 터득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른 삼매를 통해서 바른 지혜가 생기고 바른 지혜가 생기면 바르게 해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른 삼매는 바른 지혜로 종결되고 바른 해탈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과정입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바른 삼매인 선정에 이를 수 있고, 그다음 선정을 이용해서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른 지혜고 그걸로 인하여 해탈이 되는 것이 팔정도의 메커니즘입니다.

간단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이 불교의 사성제와 팔정도의 기본 틀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7월 20일 금정총림 범어사 선문화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범어사 금정불교대학 2024년 상반기 초청특강’에서 초청 강사 일묵 스님이 ‘부처님의 바른길, 중도’를 주제로 설한 강의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1740호 / 2024년 8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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