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락 감정에서 벗어나는 한마디 “삼수(三受)야 가라”

진우 스님의 선명상아카데미 제6강 '지금부터 걱정을 사라지게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대신심 바탕으로 현상에 일희일비하는 고락사서 벗어나야 사회 갈등·분열도 변화 길 찾을 수 있어

2024-08-13     남수연 기자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선명상 아카데미 제6강에서 “감정에 끄달리지 말 것”을 거듭 강조했다. 진우 스님은 ‘지금부터 걱정을 사라지게 한다’는 주제로 8월 13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열린 강좌에서 갖가지 현상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고락사(苦樂捨)’의 ‘삼수작용(三受作用)’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 바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역설했다. 진우 스님의 여섯 번째 강의를 요약했다. [편집자]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선명상 아카데미 제6강에서 “감정에 끄달리지 말 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이미 과거로부터 이어진 습관, 버릇의 작용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마음과 인식 또한 미래로 연결돼 지속 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물고 물리며 인과가 생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마음이라는 감정을 일으킨다. 그것이 인과다.

지금의 모든 현상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긴 것이 아니다. 부모의 유전자가 선대로부터 이어지고 내 유전자가 후대로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 그러하듯 지금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덩어리, 이것을 업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과거로부터 이어져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단절된 현재는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감정이든, 생각이든, 신체든 업식의 덩어리가 과거부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당연히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만 보이는 우리의 몸 또한 이러한 이합집산의 결과다. 현대의 물리학, 양자역학에서는 우리의 몸이 원자가 모여서 형성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원자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알갱이다. 그 원자를 운동장만하게 확대해 보면 그 안에 구슬만한 원자핵이 있다. 그리고 이 원자핵의 몇 만분의 1 크기의 전자가 그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런데 이는 관찰하는 즉시 사라진다. 그래서 이를 알갱이가 아닌 파동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현상계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미 2600여 년 전에, 한국에서도 이미 의상 스님, 원효 스님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이러한 구조를 이미 다 알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상 스님의 '법성계', 원효 스님의 '기신론'으로 정리돼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그럼에도 별거 아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현상은 생로병사, 성주괴공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다 없어지는 것들이다. 내 의식과 마음, 감정이 끌어모은, 끄달려 온 원자들이고 결국은 사라진다.

현상계는 천변만화한다. 하지만 사실은 별거 아니다. 내가 육근을 통해 접하는 육경, 내 앞의 그것조차도 내가 짓는 것이다. 즉 내 기분에 따라 짓거나 내 기분에 따라 보는 것이다. 이를 모두 기분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크게 나눠 보면 좋은 기분, 나쁜 기분, 그리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분이다. 이 세가지 기분을 고, 락, 사(苦, 樂, 捨)라 한다. 인간의 감정은 결국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로 귀결된다. 대부분은 좋으냐 싫으냐의 문제로 나타난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모여 있는 것도 이것이 좋기 때문이다. 싫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갈 것이다. 인생에 많은 삶의 경로가 있다.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유리하겠다,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다는 것, 나쁘다는 것을 구분짓는 데에는 그동안 쌓여온 습관도 작용을 할 것이고 인과라는 업도 작용을 할 것이다.

결국 현상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나 나의 기분이 나쁘냐 좋으냐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하는 것이 고락의 업덩이다. 그 업덩이에는 좋은 것이 생긴 만큼 나쁜 것이 똑같은 크기로 생겨난다. 그리고 앞서 강의에서도 수 차례 강조했듯이, 해가 뜰 때가 되면 해가 뜨듯이, 좋고 나쁜 감정은 그것이 나타날 때가 되면 한 치도 틀림 없이 작용한다. 다만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가 때로는 찰나이기도 하고, 5분 간격일 수도 있고, 하루만일 수도, 한달, 1년, 평생일 수도 있다. 다음 생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겹쳐서 업이 작용하는 것을 양중인과, 중중무진이라고도 한다. 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라고도 한다. 마치 우주에 많은 별들이 수없이 겹쳐있고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많은 생명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찍이 스님들은 이를 인드라망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 혼자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우주 전체가 서로 영향을 받는 속에서 이루어지고 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고락의 인과 작용, 감정을 제로화시키는 것을 견성, 성불, 깨달음이라고 한다.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비로소 업장 소멸이다. 만약 과학이 더 발전하면 이런 현상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불교에서는 이를 신통, 그 가운데서도 숙명통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 하는데 숙명통을 얻은들 무엇을 할 것인가. 내 감정에 좋고 싫음이 여전히 일어난다면 숙명통을 무엇에 쓰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들이 지금 당장에 나타난 일인 것 같지만 과거에 내가 했던 업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타나는 현상만 갖고 기분 나빠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왜 저 사람은 지금 나를 이렇게 대할까 싶지만 그 사람 또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업식이 지금 나타날 때가 되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때가 된 것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해서 내가 괴롭고 내 기분이 나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대의 과거 업식이 있을 것이고 기분 나쁘고 괴로운 나 역시 그럴 수 밖에 없는 때가 된 것 뿐이다.

이러한 원리를 알기에 조사들은 육근이 받아들이는 현상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내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싫은 일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좋고 나쁨의 업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나타날 일이 없는 것이다. 현상은 현상대로, 연기적으로 나타나는 것 뿐이지 나는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경전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르침 또한 "현상은 그냥 현상에 맡겨라" "공일 뿐이다"이다. 현상에 대해 시비하지 말라, 마음을 뺏기지 말라, 끄달리거나 미련을 갖거나 김정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현상을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하고 기분 좋고 나쁘다고 마음 일으키는 것은 내 업장, 내 업식이다. 이 감정 덩어리, 업 덩어리를 없애야 기분 나쁜 일도 안 생긴다. 남이 보기엔 나쁜 일이지만 내가 기분 나쁘지 않다면 기분 나쁜 일은 없다. 진짜 문제는 내 고락의 인과, 업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절에서 참선이나 염불, 간경, 절 등 각종 수행을 한다. 내가 갖고 있는 '고락사(苦樂捨)의 삼수작용(三受作用)’이라는 감정 덩어리를 내 스스로 조정하는 과정이다. 조정 할 만한 것도 없을 경계까지 가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 불보살이 우리를 보며 느끼실 가장 큰 안타까움은 아마도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에 기분 좋고 나쁨이 없도록 육근을 청정하게 해야 하는데, 자꾸 좋고 나쁨이 생겨 버린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탐진치의 삼독심을 없애야 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탐심, 진심, 치심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 순간, 매 찰나에 방하착 해야 한다. 모든 것은 인연 현상에 맡겨 놓고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하지만 사회에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이 있다. 견성, 반야, 지혜, 보리,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고락시비가 없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라면 정의가 생기면 반드시 불의는 생긴다. 내가 극락에 있더라도 내 마음이 분별심을 내는 순간 극락도 선악, 고락으로 갈라진다. 유사 이래 세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각자의 정의다. 각자가 느끼는 분별이다. 즉 내가 고락이라는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세상의 굴레에서도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남들까지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만 잘하면 된다. 나의 업장만 없애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한다. 스스로 고락이라고 하는 감정 덩어리를 제로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명상 중에 최고는 화두를 타파하는 간화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으면 대신심이 생기고 그러면 화두를 타파겠다는 대분심이 생기고, 그 이후엔 ‘이것이 무엇이가’라고 의심하는 대의증이 생긴다. 이것이 차례로 이어져서 은산철벽을 뚫으면 고락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대다수는 그렇게 단박에 수행할 근기가 안 된다. 한 번에 화두를 타파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힘드니 선명상부터 하자는 것이다. 5분 명상이든, 무시로 명상이든 해보자는 것이다. 명상을 한다는 것은 감정의 삼독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내 감정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서 흙탕물 같은 마음이 맑게 가라앉도록 해야 한다. 욕심을 줄이는 것이 출발이고 좋고 싫은 감정이 나타날 때에는 그것이 내 업의 작용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조금씩 해 나가야 한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도 그 마음을 멈춰야 한다. 놓고 놓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 마음의 흔들림을 잘 다스려야 한다, 방하착이 돼야 더 고통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제임스 진스라는 영국의 물리학자는 “우주는 커다란 물리적 현상이라고 보기보다는 거대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이 우주를 보는 즉시 저 우주가 생긴다”고도 말했다.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콘 헨리는 ‘우주는 정신적인 것이다. 유일한 현실은 내가 관측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또한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주를 대상, 물체로 한정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 또한 일체유심조와 같은 뜻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제서야 부처님 말씀에 조금씩 근접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야 대신심을 일으킬 수 있다. 현상에 대한 반응을 너무 민감하게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명상을 반드시 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 가장 기본은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매일매일 ‘5초 명상’, 5분 이상 ‘무시로 명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지나가리라 명상’, 현상에 분멸하지 말라는 ‘그림자 명상’에 이어 오늘은 ‘다 인연따라 가니 마음 뺏기지 말고 방하착 하라’는 의미를 담아 ‘삼수야 가라 명상’이라고 명명해본다. 고락사(苦樂捨)라는 삼수작용(三受作用), 즉 감정에 놀아나지 말자는 거다. 감정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면 업, 인과, 분별, 윤회에 걸린다. 나머지는 인연 연기에 맡기는 것이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741호 / 2024년 8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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