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강 스승 환응탄영
경전의 오묘한 이치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경안 밝혀준 전강 스승 운문암에서 수십 년간 후학 지도한 대강백이자 선사이며 율사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서 교정으로 추대된 당대 최고 고승 만암 스님 재능 꽃피우고 강맥 전해 강사의 길 걷도록 이끌어
은사 취운도진 스님이 만암 스님에게 출가자의 길을 열어주었다면,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스님은 경전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경안(經眼)을 밝혀주었다. 환응 스님은 만암 스님의 재능을 꽃피웠으며, 강맥(講脈)을 전해 강사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다. 역사학자 이능화(1869~1943)가 ‘조선불교통사’(1918)에서 ‘환응 화상은 선(禪)과 계(戒)를 만암에게 전했다’고 명시한 것은 두 스님의 각별한 관계가 백양사를 넘어 널리 알려졌음을 시사한다.
환응 스님은 강백이면서 선사였고, 율사였다. 백양사 주지를 지내고,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의 한 명으로 추대된 고승이었다. 당시 기록에 ‘환응 스님은 계율을 엄격히 잘 지켜 청정하고, 일생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공경하기를 부처님같이 하였다’고 전할 정도로 널리 존경받았다.
환응 스님의 고향은 만암 스님과 같은 전북 고창이다. 스님은 14세 때인 1860년, 선운사 석상암으로 출가했다. 1년여의 행자 기간을 거쳐 이듬해 선운사 보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다음 해 2월에는 백암산 운문암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경담서관(1824~1904) 스님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경담 스님은 백파긍선 선사의 3대 법손으로 설두유형, 함명태선 스님과 더불어 호남의 3대 강백으로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환응 스님은 경담 스님으로부터 ‘원각경’ ‘금강경’ ‘능엄경’ ‘법화경’ ‘경덕전등록’ ‘선문염송’ 등 불교 내전을 익혔다. 이어 순창 구암사의 설두유형(1824~1889)과 순천 송광사의 우담홍기(1822~1881) 스님에게서도 다양한 경전을 배웠다. 설두 스님은 백파 선사의 문손으로 ‘선원소류’를 지어 백파 선사를 옹호한 선과 화엄의 대가였다. 반면 우담 스님은 ‘선문증정록’을 지어 백파 선사의 선 이론을 맹렬히 비판한 강백이었다. 설두 스님과 우담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계를 뜨겁게 달궜던 선논쟁의 주역으로서 선에 대한 견해가 확연히 달랐다. 그럼에도 환응 스님이 이들 모두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는 것은 스님의 학문 열정과 치우침 없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환응 스님은 구암사와 송광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8년 만에 운문암으로 돌아와 경담 스님의 법을 이었다. 1877년부터는 노쇠한 경담 스님을 대신해 운문암 강석(講席)을 맡아 후학을 이끌었다. 스님은 이후 수십 년간 운문암을 떠나지 않고 경전을 강의했다. 불교 내전과 외전에 두루 밝아 어느 자리에서나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박학강기(博學强記)에다가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청정한 언행은 대중들이 깊이 존경하고 따르도록 했다.
1911년 6월 3일,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고 30본산 제도를 시행했을 때 본산으로 지정된 백양사 첫 주지에 환응 스님이 추대된 것도 학덕과 인품 때문이었다. 당시 환응 스님은 1년을 넘게 주지를 고사했다. 1912년 12월 부득이 소임을 받아들이고도 백암산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항시 손에서 경전을 놓지 않았으며 화두 참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16년 만암 스님에게 백양사 주지직을 인계하고, 상좌 호명 스님이 1921년 도솔산 선운사 주지가 된 후에야 그곳 산내 암자인 동운암에 자리 잡았다. 사미계를 받고 떠난 지 61년 만에 도솔산으로 돌아간 것이다. 환응 스님은 동운암에서 기도와 정진을 꾸준히 이어갔다. 또 그곳에서 선운사 대중들에게 율장을 가르쳤다.
환응 스님을 향한 불교계의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1929년 1월 5일,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는 교정(敎正)으로 선임됐다. 교정은 지금의 종정(宗正)으로 당시 불교계에서 환응 스님의 위상을 가늠토록 한다.
1929년 3월, 환응 스님은 자신의 입적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50년 넘게 머물렀던 운문암과 백양사를 다시 찾아 일일이 둘러보았다. 도솔산으로 돌아간 스님은 4월 7일 오전 11시 세수 84세, 법랍 70세에 목욕재계하고 긴 생애를 마무리했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꼿꼿이 걸었던 환응 스님이 원적에 들자, 하늘에서 오색과 백색의 상서로운 빛줄기가 잇따라 선운사를 비추는 이적이 펼쳐졌다. 선운사 대중들은 “우리 불교에서는 방광이니 사리니 하는 것을 그렇게 중대시하지 아니할뿐더러 입적하신 스님께서 일생을 통해 무상(無相)을 으뜸으로 삼은 까닭에 절대로 사양했으니 이를 발표하는 것은 도리어 스님의 본뜻을 거스르는 것이다”라며 숨겼다.
그러나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기자들이 찾아와 취재하고 신문에 실었다. 선운사 대중들은 사실이 왜곡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논의 끝에 주지스님이 직접 당시 불교계 대표 잡지인 ‘불교’(제64호, 1929.10.1)에 환응 스님의 입적 후 계속된 방광(放光) 사실을 전했다.
만암 스님이 10세에 출가했을 때 환응 스님은 40세로, 운문암에서 10여 년째 경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두 스님이 처음 만난 것은 만암 스님이 출가한 직후였을 것이다. 운문암은 백양사에서 3.5km 남짓 되는 가까운 거리다. 당시 백양사는 자연재해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기에 만암 스님은 운문암에서 사미과를 이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창건된 운문암은 백양사의 가장 큰 산내 암자다. 조계산, 무등산 등 호남의 명산들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수많은 수행자가 정진했던 길지다. 조선시대 부처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진묵(震默) 스님 일화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직전, 진묵 스님이 운문암에서 차를 달여 불보살과 호법신장 등에 공양 올리는 다각 소임을 맡았을 때였다. 어느 날 호법신장들이 대중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가 불보살님을 모셔야 하는데 도리어 예경을 받게 돼 황송하니 다각 소임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대중들은 똑같은 꿈을 꾼 것을 신기해했다. 진묵 스님이 보통 스님이 아님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조실(祖室)로 모셨다. 그곳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불사를 진행하던 진묵 스님이 어느 날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에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운문암이 불탔지만 만암 스님이 운문암에서 공부할 때까지도 금빛이 아닌 거뭇한 불상이 전해지고 있었다. 훗날 운문암은 만암 스님을 비롯해 용성, 학명, 운봉, 동산, 금타, 고암, 전강, 인곡, 서옹, 청화 스님 등 수행자들이 정진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운문암에서 소년 만암은 환응 스님으로부터 ‘반야심경’ ‘초발심자경문’ ‘치문경훈’ 등을 배우며 승려로서의 소양과 위의를 갖춰나갔다. 만암 스님은 어리지만 야무지고 학문적인 재능이 뛰어나 환응 스님의 눈에 자주 띄었다. 만암 스님이 15세 때 운문암을 떠나 순창 구암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한 데에는 환응 스님의 권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설유처명(1858~1903) 스님이 강의하던 구암사는 선과 화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학인들이 연찬을 거듭하는 당대 최고의 강학도량이었다. 젊은 시절 구암사에서 직접 공부했던 환응 스님은, 만암 스님이 그곳에서 교학을 깊이 배우고 견문도 넓히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구암사에서 대교과를 마친 만암 스님은 연담 스님의 진영을 가슴에 품고 백암산으로 돌아왔다. 소년티를 벗고 청년이 된 만암 스님은 운문암에서 다시 환응 스님으로부터 경학을 익혔다. 환응 스님은 화엄과 선, 계율에도 정통했다. 일거수일투족 흐트러짐이 없었던 환응 스님은 출가자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만암 스님은 환응 스님으로부터 교학과 수행뿐 아니라 어떻게 출가자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고 배웠다. 불보살에 대한 신심도 매우 깊어 환응 스님은 아침저녁으로 관세음보살과 16나한을 예경하고 공양을 올렸다. 그것은 출가 무렵 시작돼 입적 때까지 일생 동안 이어졌다. 또 경전 강의를 시작한 후 화장실에 갈 일이 있으면 옷부터 갈아입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와서도 반드시 목욕하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강의할 정도로 정성스레 경전을 대했다.
환응 스님이 경전과 수행을 대하는 엄격한 자세는 만암 스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만암 스님은 환응 스님의 지도로 경전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지고 출가자로서의 사명감도 확고해졌다. 만암 스님이 ‘자서약력’에서 “처음엔 출가한 본래의 취지를 몰랐고 불문(佛門)에 들어온 지 10년 성상이 흘러서야 선과 교에 있어서 얼마쯤 섭렵했기에 본래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대충 파악했다”고 회고한 것도 이 무렵이다.
환응 스님의 교육 철학은 단순히 경전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 깊은 의미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었다. 만암 스님도 환응 스님으로부터 교학과 수행, 계율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 경전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 속에 담긴 경전의 의미를 깊이 숙고해 마음속에 새겨나갔다. 경전의 문자적 해석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철학적 깊이를 탐구하는 법도 차근차근 익힐 수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만암 스님의 철학과 방법론은 환응 스님에게서 크게 영향받았다고 할 수 있다.
환응 스님은 만암 스님의 든든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1898년, 만암 스님이 23세의 젊은 나이에 운문암에서 강의할 수 있었던 것도 환응 스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훗날 불혹을 갓 넘긴 만암 스님이 30본산 중 하나인 백양사 주지에 취임할 수 있었던 데에도 환응 스님의 지지가 매우 컸음이 자명하다.
만암 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김소하(대은 스님, 1899~1989)가 ‘불교’ 제63호(1929. 9)에서 밝혔듯 만암 스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환응 스님과 학명(1867~1929) 스님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929년 4월 환응 스님이 입적하고 절친한 도반이자 선배인 학명 스님도 세연을 접었다. 이에 만암 스님은 그해 11월 18일 길일이라는 날짜에 맞춰 백양사 주최로 성대한 추도회를 열었다. 만암 스님은 손수 지은 시를 낭송함으로써 스승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그 무렵 이미 만암 스님은 스승 환응 스님을 빼닮아 있었다. 환응 스님처럼 만암 스님도 교학에 정통한 강백이었고, 화두를 깨친 선사였으며, 엄정한 계율의 수호자였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43호 / 2024년 9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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