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 총무원장 상진 스님
생전예수재는 업장 소멸하며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 부처님은 인연 강조, 이생에 불법 만난 인연은 전생 복덕의 결과 사경은 훌륭한 수행, 경전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채워 나가는 것 아는 만큼 실천하고 항상 자신을 돌이켜 나가는 것이 참 불자 길
우리는 오늘 생전예수시왕생칠재를 봉행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는 현생에서 수행을 닦아 업장을 소멸하고, 다음 생에 극락왕생(極樂往生)의 길을 준비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현재의 삶에서 미리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함께 수행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이라는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하고 극복할 것을 가르칩니다. 삼독심은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이로 인해 삶에 번뇌와 고통을 불러오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집착과 욕심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으면, 고통으로 변하고 번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통해 이러한 번뇌를 소멸하고,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우울감에 빠집니다. 이러한 우울감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거나, 스스로는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 그때 우울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내면의 집착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탐진치(貪瞋癡)를 없애지 않으면 번뇌는 계속 찾아오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최근 청련사에 의사들이 방문하여 아픈 불자들을 치료하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몇몇 신도들은 건강을 회복하고 기쁨을 누렸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 신도는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모든 병이 다 있는 것 같은데 왜 스님은 그렇게 건강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의사가 자신을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와 같은 반응들을 보며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연이 맞지 않으면 포교도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왜 인연이 맞지 않느냐 하면, 부처님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야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이 내 마음에 새겨지는 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시 제자들에게 인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중생을 위해 말씀을 전하셨지만, 모든 중생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왜 저 사람은 여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답하셨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는 여러분은 귀중한 인연을 맺은 것입니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기본 교리로서, 우리의 수행을 위해 꼭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첫 번째는 고성제(苦聖諦)로, 인생의 모든 고통은 집착과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집성제(集聖諦)로, 이러한 집착과 욕심이 쌓이면 고통이 계속됩니다. 세 번째는 멸성제(滅聖諦)로, 집착과 욕심을 버리면 고통이 멸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도성제(道聖諦)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바른 길을 찾는 것이 수행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통해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모두가 다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실천하지 않으면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아는 만큼 실천하고, 자신을 돌이켜 나가는 것입니다.
지난번 법문에서 “보리가 될래, 쌀이 될래?”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보리는 익어도 그대로 서 있습니다. 이는 지혜가 없고 집착만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반면,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이는 겸손과 지혜가 함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속 알맹이가 차야 하심(下心)을 할 줄 알게 됩니다. 하심이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항상 고개를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고 오늘 우리가 이 생전예수시왕생칠재를 봉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탐진치로 인해 쌓인 업장을 미리 소멸하고, 다음 생에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재(豫修齋)’란 말 그대로 미리(豫) 닦을(修) 수 있는 재(齋)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기독교의 ‘예수’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이 주재하는 깨달음과 행복의 세계로, 모든 중생들이 고통 없이 참된 지혜와 자비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발원하며, 올바른 삶을 살고, 복덕을 쌓으며, 다른 사람들을 돕는 행을 해야 합니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최근 법보신문 기사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사실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기도’ ‘예배당’ 등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들이 불교에서 온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불교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가 단순히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우리 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교는 한반도 역사와 함께해 왔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 땅에 평화와 화합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중심이 되어 수많은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으며 불교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불교에 대한 편향적 정책이 많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헌법을 7번이나 위반했고, 불교를 탄압하는 유시를 여러 차례 내린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을 태고종의 앞마당인 송현광장에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과 종도들이 굳건하게 맞서 이를 철회시켰고, 서울시장도 와서 참회를 했습니다.
불교계는 이렇게 꿋꿋이 우리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불교는 그만큼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시에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며, 사경(寫經)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하고 사경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하고, 해안(解眼)을 열어주는 중요한 수행 방법입니다. 사경은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경전의 말씀으로 채워 나가고, 번뇌를 없애는 중요한 수행법입니다. 우리 종단 신도님들 중에는 사경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많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행에 동참하길 바랍니다. 사경을 통해 마음을 닦고, 지혜가 원만해지며, 참선자의 의단(疑團)이 분명해지고, 염불자의 삼매(三昧)가 현전해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삼독심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염불(念佛) 또한 중요한 수행 방법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는 것은 단순한 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진실되게 하여 삼매에 들게 하는 길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진실됨이 삼매에 들어서게 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사라지게 합니다. 삼독심으로 탁해진 마음은 사경과 염불을 통해 서서히 맑아지고,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 Huineng) 스님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우리 본래의 마음이 항상 깨끗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닦아야 할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찾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그러한 마음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이 생전예수재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생을 조금 더 즐겁고, 편안하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사경을 많이 하시고, 경전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법문이 여러분의 수행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상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 법문은 8월 24일 양주 청련사에서 봉행된 ‘불기 2568년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생전예수시왕생칠재 입재식’에서 태고종 총무원장 상진 스님이 ‘생전예수재’의 의미를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744호 / 2024년 9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