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의총, 의승·의병 함께 기린 모범 공간이었다”
본지 논문 취합해 확인…임진난 직후부터 1940년대까지 제향
금산의총(칠백의총) 순의제향은 조선말 서원이 철폐되는 상황에서도 금산의 유림이 의승과 의병을 함께 존숭해 받드는 제례를 이어온 모범 사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고종 8년(1871) 서원철폐 이후 밀양 표충사 향례가 중단됐을 때에는 그곳 불교계가 금산의총 제향을 예로 들어 밀양지역 사림을 설득해 표충사 향례를 재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까지 금산의총 순의제향에서 조헌과 함께 순국한 영규대사 등 의승들을 배제하는 것이 반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반역사적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은다.
본지가 조계종 미래본부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 스님) 주최로 10월 24일과 31일 두 차례 개최된 ‘영규대사와 800의승 학술세미나’의 발제문과 지금까지 발표된 관련 논문을 취합해 살펴본 결과 영규 스님과 800의승 제향은 금산지역 유림과 국가 주도로 임진왜란 직후부터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이전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으로 확인됐다.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 뇌묵처영(雷默處英, ?~?) 등 의승장을 배향한 사액 사우(賜額 祠宇)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150~200년쯤 뒤에야 건립된 것에 미루어 보면, 조헌·고경명과 함께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기린 순의제향이 봉행되고, 의승 사당인 승장사(僧將祀)가 건립된 금산의총은 국가와 유림이 이념을 떠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의승을 인정하고 기린 모범적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1634년 첫 제향…조헌·고경명과 별도 단 쌓아 영규·의승 제사
금산의총에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제향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36년이 지난 인조 12년(1634)부터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영조 35년(1759) 전국 각 읍에 있는 서원, 사우, 영당의 사적(事蹟)을 조사·정리해 도별로 편찬한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금산군수 김성발과 제원역찰방(濟原驛察訪) 조평이 상의해 의총 앞 높은 언덕에 단(壇, 殉義壇)을 설치했다. 이때 이들은 조헌과 함께 순국한 고경명, 변웅정, 영규 스님의 전적지가 모두 5리 이내에 있다며 함께 제사 지내기로 했다.
조평이 금산의총에 순의단을 세우고 제향을 시작할 때 지은 ‘시사의총서(始祀義塚序)’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영규는 승려다. 죽을힘을 다해 강한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어찌 제사 지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같은 단에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제단의 동쪽에 따로 모래로 단을 쌓아 높낮이를 같게 만들었다.”
조평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영규 스님을 제사 지내는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지적하고, 유생과 승려를 함께 제사 지낼 수 없으니 조헌·고경명 등과 별도로 동쪽에 단을 세워 영규 스님을 제향했음을 알 수 있다.
위패만 합사했을 뿐, 제례에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철저히 배제한 국가유산청의 금산의총 순의제향 행사가 얼마나 왜곡 편향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종용사 서편에 승장사 건립 위패 배향…고기 대신 두부 제물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은 일회성, 또는 짧은 기간의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금산의총 내 사당인 ‘종용사(從容祠)’가 세워진 것은 영규 스님에 대한 제향이 처음 있은 지 12년쯤 뒤인 인조 24년(1646), 또는 그 이듬해의 일이다. ‘열읍원우사적’에 따르면 종용사에는 조헌과 고경명을 주향(主享)으로 위패를 모셨고, 동벽에 3인, 서벽에 4인을 추가로 배향했다. 종용사 서쪽에는 별도의 사당을 조성해 영규 스님을 주향으로 모셨다. 정조 연간에 편찬된 ‘금산군읍지’에 따르면 영규 스님을 모신 사당의 이름은 ‘승장사(僧將祠)’였다. 승장사에는 800의승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영조 30년(1754)에 종용사를 참배한 황윤석이 남긴 “종용사 오른쪽 별실에 승장 영규 대사의 위패와 그 오른쪽에 승장사졸(僧將士卒)의 위패가 있다”는 기록(‘이재난고’ 2, 1754년 3월 4일)으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봄·가을 두 차례 국가 차원 추모…“승장별단 제향 비용 17원”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은 인조 12년 금산의총에 순의단이 세워진 이래 150여 년 이상 이어졌다.
영조 연간인 1757년부터 1765년까지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열읍원우사적’에 따르면 금산의총 제향은 봄과 가을의 마지막 정일(丁日)에 지냈다. 종용사에서는 사변사두〔四籩四豆, 대나무 제기인 변기(籩器) 네 개와 나무 제기인 두기(豆器) 네 개로 차려 놓은 제수(祭需)〕로 제사를 지냈고, 승장사에서는 고기 제물 대신 두부로 바꾸어 올렸다.
영조 “의승 영규 등 칠백의총에 관리 보내 제사 지내라” 어명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라는 뜻의 ‘제향(祭享)’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산의총은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본 곳이었다.
효종과 현종, 숙종은 예관을 파견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도록 했고, 영조는 즉위 48년(1772) 1월 16일에 임진왜란 발발 3주갑(180년)을 맞아 특별히 “의승 영규 등 칠백의총에 본관(本官, 고을의 수령, 또는 목사, 판관, 부윤 등의 관리)을 보내 전례에 따라 치제하게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영조가 ‘의승 영규’를 직접 언급한 것을 보면, 종용사에 배향된 조헌·고경명뿐만 아니라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국가 차원의 추모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 해 두 차례 봄·가을 정기적으로 지내는 제향 또한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다. ‘열읍원우사적’에 따르면 봄 가을로 지내는 제향에 사용하는 제물은 관에서 갖추어 마련했고, 유림은 제육(祭肉)만 담당했다.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도 유림의 끈질긴 청원으로 제향 이어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서원에서 제향이 끊어졌을 때도 금산 지역 유림은 끈질긴 청원으로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을 이어갔다.
‘조선사찰사료’에 수록된 ‘서원향례복사기(書院享禮復祀記)’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계미년(1883)에 본사(本寺)의 승려 포허찬명(包虛璨溟)이 석장(錫杖)을 들고 운유(雲遊)하다가 공주와 금산 지역에 이르러 양읍(兩邑)의 사림(士林, 유림)이 서원을 철폐한 뒤에도 여전히 기허당을 존중하여 받드는 예의를 보고 돌아와 본읍의 사림을 설득하여 문건을 갖추어 본부(本府, 지방관이 자기가 속한 관부를 일컫는 말)에 고하였다.…갑신년(1884) 봄부터 향례를 모시게 하였으니,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밀양 유림, 금산·공주 유림 제향에 자극받아 표충사 제향 재개
서원철폐령으로 밀양 표충사의 제향은 이미 중단되었는데도 공주와 금산 지역의 유림은 여전히 영규 스님에 대한 제향을 이어갔으며, 이에 자극받은 포허 스님이 밀양 지역 유림을 설득해 표충사 제향을 다시 이어가도록 관아에 청원했다는 내용이다. 포허 스님의 노력은 이듬해 봄부터 향례를 재개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서원향례복사기’ 기록과 “종용사 의단은 봄 가을 제향에 60원, 승장별단에 17원이 필요하다”는 광무 2년(1898) 7월 작성 ‘각 지방 제사에 관한 청의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조선 말까지 금산의총에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이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내선일체 정책 강화…의총·승장비 등 훼손되며 제향 끊겨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이 끊긴 것은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 정책을 강화하면서 금산의총을 훼철한 194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당시 종용사와 의총이 훼손되고, 일군순의비, 고경명 순절비, 영규대사 승장비, 권율 장군 이치대첩비 등이 모두 부서졌다.
끊겼던 제향이 다시 시작된 것은 영규 스님과 800의승, 조헌이 순국한 지 6주갑(360년)이 되는 1952년이지만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은 복원되지 않았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과 1970년 금산의총 보수정화를 지시한 뒤 종용사 신축, 강당 개축, 분묘 확장, 일군순의비 개건, 칠백의사순의탑 건립 등 성역화 사업이 진행됐지만, 여전히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과 승장사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재에 이르렀다.
고증 잘못으로 의승 제향·승장사 복원 배제…“반쪽짜리 성역화”
임진왜란 직후 시작돼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이전까지 금산의총에서 이어져 온 영규 스님과 800의승에 대한 제향 관련 기록은 국가 제향 행사에서 의승이 홀대받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릇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것은 보살이 할 일이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함은 불법을 따른 우리 조상이 대대손손 받들어 온 전통”(서산 휴정 ‘격문’)이라며 참전한 의승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의승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상과 예우는 개인 차원에서 그쳤다. 이와 관련 김상영 중앙승가대 명예교수는 “영규 스님을 시작으로 휴정, 유정, 처영, 의엄, 쌍익 스님 등에게 관직이 제수됐지만, 대부분 상징적 의미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의승에 대한 추모사업이 국가의 외면을 받은 사실은 서산 휴정, 사명 유정, 뇌묵 처영 등 의승장을 모신 사액 사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50~2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건립된 것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승장 사우 외면에도 조선 조정과 유림, 금산의총에서 영규·의승 제향
임진왜란 직후 조선 조정은 전쟁에서 활약한 충신열사를 추모하는 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선조 36년(1603) 고경명과 고종후 등의 위패를 모신 포충사에, 이듬해 이순신, 이억기 등의 위패를 모신 충민사에 사액을 내렸다. 현종~숙종 대에는 왜란 당시 활약한 충신열사를 추증하고 사우를 건립하는 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하지만 의승의 희생과 전공을 추모하고 의승장을 배향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사우를 건립하기 위해 스님들이 “발이 부르트도록”(서유린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 많은 사람을 만나고, “죽음을 무릅쓰는”(‘대둔사지’) 용기를 낸 뒤에야 정조 12년(1788)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에 표충사를 건립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건립된 사액 사우인 밀양 표충사는 영조 14년(1738),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酬忠祠)는 정조 18년(1794)에서야 건립됐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임진왜란 직후부터 1940년대 이전까지 금산의총에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제향한 것은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은 국가와 유교 윤리에 기반해 이상 세계 실현을 꿈꾸었던 유림이 이념을 떠나 전란의 최일선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의승의 고귀한 희생과 구국정신을 인정하고 기렸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금산의총은 의승(군)을 추모하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혜공 스님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1940년대까지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제향한 기록에 대해 “유림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근거가 확인돼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기록을 바탕으로 조헌·고경명 선생 후손 대표와 충분히 대화하고, 내년에는 올바른 제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계종 중앙종회 영규대사및800의승명예회복을위한특별위원회 위원장 성제 스님도 “유림이 영규대사에 제향을 올린 기록이 있다면 지금도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유림은 영규 스님과 800의승을 제향했던 선조들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총은 순국선열 모두의 추모 공간…‘금산의총’ 명칭 변경 근거
금산군수 김성발과 제원역찰방 조평이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면서 금산의총을 조헌과 700의병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금산전투 중 순국한 영규 스님과 800의승, 고경명과 그 휘하 의병, 해남현감 변응정 등을 함께 기리는 공간으로 삼은 것도 시사하는 바 크다. 금산의총이 처음에는 조헌만을 위한 추모 공간으로 조성되었을지 몰라도,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모든 이를 아우르는 추모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칠백의총’이란 명칭을 고집하지 않고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모든 이를 기리는 뜻에서 ‘금산의총’으로 명칭을 바꿀 수 있는 근거와 당위성도 여기에서 확보할 수 있다.
조헌기념사업회장 “국가적 의승 현창 당연…승장사 미복원은 국가의 업무 방기”
승장사 복원 문제도 당면 과제로 지적된다.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규 스님과 800의승의 위패를 모신 승장사가 종용사 서쪽에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규 스님을 기린 승장비도 금산의총 경내에 세웠던 것을 감안하면 일제의 훼철 이후 1960년부터 이어진 성역화 사업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김문준 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금산의총을 성역화하면서 제대로 고증하지 못한 게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2022년과 2023년 진행된 종합정비사업에서도 제대로 고증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회 사적분과에 기념관을 헐지 말 것과 무명의병 위패 대신에 이름이 밝혀진 의병과 승병을 기념관에 모시자고 제안했지만 끝내 기념관을 허물었다고 밝혔다. 김 사업회장은 “의승장과 의승을 지금처럼 대하면 안 된다. 국가적으로 현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국가적 승병기념관 하나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유림, 의승 위패 합사 비난 말고 정부에 승장사 복원 요구해야
일부 유림은 “정부가 종용사를 새로 건립하면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의 위패를 강제로 합사했다”고 주장하며 부당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위패를 모셨던 승장사가 훼철된 상태에서 영규 스님과 800의승의 위패를 종용사에 합사한 것은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다. 합사한 것이 불만이고 불합리하다면 순의제향 제례에 의승을 포함해 전공에 합당한 예우를 해달라는 불교계의 요구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부에 승장사를 복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순리이다.
김문준 회장은 이와 관련해 “승장사의 위치 등 사료는 차고 넘친다”고 지적하고, “종용사 오른쪽에 승장사를 지으면 되는데 지금껏 짓지 않는 것은 국가의 명백한 업무 방기”라고 주장했다.
윤인수 칠백의총관리소 학예사는 “1952년 금산구민이 금산의총을 재건할 때 종용사만 복원했다”며, “내년 순의제향 제례를 어떻게 진행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시간대를 달리해서 지내거나 승장사를 복원하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이창윤 전문위원·박건태 인턴기자 nolbune@beopbo.com
[1751호 / 2024년 11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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