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백양사와 임제종 운동

환응·석전·만암 스님 등 참여…백양사 전통불교 수호자로 주목 개항 후 정토진종·일련종·진언종 등 일본 종파들 포교 착수 원종, 일본 조동종과 불평등 연합맹약 체결에 임제종 창립 만암 스님 뼛속 깊이 각인…해방 후 불교정화운동과 맞닿아

2024-11-08     이재형 대표
1908년 11월에는 원흥사에 원종 종무원이 설립됐다. 원종은 회광 스님이 종정을 맡고, 일본 극우 인사인 조동종 다케다 한시를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일본불교 종속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진은 1902년 원흥사 창건 기념 법회 추정.

조선이 개항하자 일본불교 종파들은 조선에 포교사들을 파견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 국가를 선포한 일본 정부는 신도(神道)를 국가이념으로 치켜세웠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불상을 파괴하고 절을 없애는 강력한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단행했다. 위기에 직면한 일본 불교계는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에서의 포교로 일본에 대한 호감을 높이고 식민지 추진 정책에 대한 반발을 줄이는 것이었다.

1877년 정토진종이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설립하고 부산·원산·광주 등지에서 포교 활동에 착수했다. 1895년에는 일련종 관장대리 사노 젠레이(佐野前勵, 1859~1912)가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조선 불교계의 실상을 면밀히 살폈고, ‘숭유억불’ 상징이 도성 출입 금지였음을 알았다. 당시 스님들이 함부로 도성 땅을 밟으면 곤장을 맞고 평생 노비로 지내야 했다. 조선에 살아도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서러운 세월, 사노는 스님들이 자유롭게 도성을 출입하도록 해달라는 건백서를 조선 정부에 제출했다. 숙원 해결에 앞장서면 조선 불교계의 환심을 살 수 있으리라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사노가 아니더라도 도성 출입 금지 해제는 이미 임박해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과 군국기무처가 그해 말 제시한 주요 제도개혁안에 도성 출입 해제가 포함될 정도로 공론화됐었다. 서양 선교사들도 이미 도성 내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 불교계는 시대 흐름을 읽지도, 일본 불교계의 속셈도 간파하지 못했다. 사노와 일본 불교계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여긴 스님들도 적지 않았다.

1895년 4월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됐다. 오랜 억불 정책의 공식적인 종결을 의미했다. 불교계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02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가 들어섰다. 이를 기념하는 축하 법회에는 스님과 신도 800여 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이었다. 1906년에는 동국대 전신으로 첫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가 출범했다. 불교계는 포교·교육 등 시대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정토진종과 일련종 외에도 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일본 종파들도 각지에 포교소를 늘려갔다.

조선 불교계가 당면한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종단 설립이었다. 신라와 고려시대 활발하던 종단은 조선시대 들어 선종과 교종으로 강제 통폐합됐다. 선종에는 조계종·천태종·총지종을, 교종에는 화엄종·지은종·중신종·시흥종을 묶은 선교 양종의 체제였다. 종단마다 정밀했던 교리·수행 체계와 고유성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500년간 지속됐던 억압이 풀리면서 불교계의 자주 의식이 높아졌다. 공동의 이념으로 교육·포교·사회·대외활동을 펼칠 종단 설립의 요구도 높아졌다.

원종(圓宗)은 1908년 3월 각 도의 사찰 대표 52인이 불교계의 열망을 담아 출범시킨 근대 최초의 종단이었다. 원종은 대중강연, 사적 조사 발간, 신문 발행, 수계식 개최를 비롯해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불교사범학교로 승격시켰다. 1910년 10월에는 각지의 스님들이 재원을 마련해 경성 전동에 각황사를 개원했다.

원종이 임의단체를 벗어나 전국적인 조직망과 교육·포교의 체계를 세우려면 종단으로 승인받아야 했다. 초대 종정에 추대된 해인사 대강백 이회광 스님은 이때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내무대신 송병준의 권유로 일본 조동종 조선포교 관리자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1863~1911)를 원종 고문으로 영입했다. 다케다는 일본의 낭인 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한국불교를 송두리째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회광 스님은 제국주의 세력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원종 설립 인가가 쉽지 않자 1910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은 그는 10월 6일 한국 원종과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맹약을 체결했다. 맹약은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듯 보였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원종을 조동종에 예속시키는 조약이었다. 원종은 조동종에 고문을 위촉해 지도받고, 조동종 스님을 포교사로 초빙해 일반 포교와 젊은 스님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다. 또 조동종이 필요로 하는 사찰에는 언제든 숙소를 제공하도록 했다. 조동종이 한국에서 교세를 넓혀나가는 데에 원종이 앞장서겠다는 내용을 사실상 명문화한 것이었다. 종단 설립으로 불교계를 결집하고 권리를 찾으려는 의도일 수 있었겠으나, 제국주의 힘을 빌려 한국불교가 성장할 수 있다는 착각과 몰이해로 빚어진 행위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회광 스님은 관련 사찰들을 찾아다녔다. 주지스님들을 만나 연합맹약을 승인하는 날인을 요구했다. 자세한 체결 내용을 몰랐던 일부 스님들은 대등한 조약이라는 말만 믿고 동의했다.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원종 종무원에서 근무하던 서기에 의해 조약 내용이 외부로 알려졌다. 불교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나라가 망한 지 40여 일 만에 벌어진 회광 스님의 반민족적인 행위에 분노했다. 이를 처음 비판하고 나선 것은 석전, 진응, 만해, 김종래 등이었다. 이들은 11월 6일 광주 증심사에서 규탄대회를 준비했으나 홍보가 안 된 탓에 참석자가 적었다. 만해 스님은 범어사 성월 스님 등과 협의해 호남과 영남 사찰에 격문을 돌려 이 사실을 알렸다.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는 300여 명의 스님이 모였다. 이들은 제1회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창립했다. 조선불교의 정통성은 조동종이 아닌 임제종에 있음을 천명했다. 어떤 경우라도 종단을 팔고 종조를 바꾸는 매종역조(賣宗易祖)를 용납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임시종무원은 송광사에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임제종을 이끌 관장도 선임하기로 했다. 논의 끝에 선암사 경운 스님과 백양사 환응 스님이 추천됐다. 모두 덕망이 높아 여러 번 선거했으나 표가 똑같았다. 결국 더 연장자인 경운 스님으로 선출하되 만해 스님이 직무를 대신하기로 최종 결의했다.

송광사 승려대회에 이어 2월 6일 증심사에서는 임제종 특별 총회가 개최됐다. 석전, 금봉, 진응, 학산, 보정, 율암, 김종래, 도진호 등 15명의 임제종 운동 주도자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만암 스님도 참석했다. 임제종을 크게 확장할 방법을 찾자는 취지로 열린 총회였다. 이들은 사찰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인 의숙을 중심으로 교육을 개혁해 나가자는 쇄신안을 마련했다. 임제종 운동이 단순히 원종에 대항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능동적으로 한국불교의 방향을 제시해 이를 실천하자는 다짐의 자리였다.

임제종은 6월 19일 하동 쌍계사에서 제2회 총회를 열고 임제종풍을 널리 선양할 것을 결의했다. 범어사의 적극적인 참여는 임제종 운동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임시종무원도 송광사에서 범어사로 이전했다. 경성, 동래, 대구, 전주 등지에 포교당을 세우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12년 5월 26일 경성 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 개교식이 열렸다. 약 1300명이 참여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 자리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도 800여 명에 이르렀다.

임제종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임제종과 원종의 활동을 지켜보던 조선총독부가 나섰다. 임제종 운동이 민족적 저항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총독부는 1912년 6월 12일 임제종과 원종 종무원 모두 현판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임제종 중앙포교당이 불교계의 지대한 관심 속에 문을 연 지 2주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원종은 바로 순응했으나 임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총독부는 6월 26일 다시 내무부 장관의 이름으로 각 도에 임제종 명칭을 쓰지 못하도록 하달했다. 총독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임제종은 결국 1년 6개월 만에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임제종 운동은 조선불교를 일본에 병합시키려는 책동에 맞서 불교계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노력이었다.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으나 불교계의 자주성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임제종 운동의 정신은 불교계의 독립운동과 불교 근대화의 이념적 기초가 됐다. 특히 3·1운동에서의 불교계 참여와 1920~30년대 만당 등 불교청년운동의 불씨가 됐다.

임제종 운동은 백양사의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했다. 광성의숙의 방장 환응 스님, 숙장 석전 스님, 학감 만암 스님, 강사 김종래 등이 임제종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백양사는 전통불교의 수호자로 주목받았다.

만암 스님에게도 임제종 운동은 뼛속 깊이 각인됐다. 해방 후 “왜구가 침범한 지 36년, 교문(敎門, 부처님 가르침)을 무너뜨림이 가장 서글펐네.” “왜구에게 빼앗긴 승가의 법규를 해방 후에도 그대로 답습하여 온다는 것은 우리 옛 고승과 대덕이 1600여 년 동안 여실히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받들어 지켜온 정성스러운 노력을 돌이켜볼 때 어찌 외람되고 한심스러우며 억울하고 통분한 일이 아니옵니까?” 등 일제강점기 불교계가 겪어야 했던 안타까움을 회고했다.

만암 스님에게 일제가 강점한 36년은 통한의 세월이었다. 스님은 묵묵히 전통 사찰을 복원하고 승가의 문화를 계승해 나갔다. 어떻게든 육조혜능 대사에서 임제의현 선사를 거쳐 태고보우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지켜내려 애썼다. 해방 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선구적으로 불교정화운동을 주창한 것도 임제종 운동의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52호 / 2024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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