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학 첨단기기로 금속활자본 판별 가능··· “소모적 논쟁도 종식”

2024-11-21     오재령 인턴기자
[기획] 다시 불붙는 최고 금속활자본 논쟁 

1.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맞나
2. ‘남명증도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
3. 과학 영역으로 넘어가는 금속활자본
4. 금속활자본 논쟁의 걸림돌들

 

금속활자본으로 주장되는 고서에 대한 과학적 검증 방법은 그동안 이미지 분석을 통한 목판본과의 비교 연구나 종이 질과 성분을 통한 연대 추측 등에 그쳤다. 때문에 해당 고서가 금속활자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개발한 ‘고출력 엑스선 형광 분광분석법’이 새로운 검증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분석법은 고서 자체에서 극미량의 금속 성분을 검출하는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한 것으로,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의 차이점을 명확히 가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속활자본 논쟁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싱크트론 방사 엑스선 분광분석 장비를 이용해 고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GIZMODO].

앞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 공인본은 이미지 분석 등 과학적 연구를 통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이 몇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최태호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2015년 먹의 농담을 제거하는 ‘스레드 홀드 기법’을 이용해 공인본의 인쇄 등고선과 인쇄압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공인본은 목판본인 삼성본보다 종이의 질이 떨어지고 가공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삼성본에서는 목판본의 특징인 나뭇결과 나무의 갈라짐이 드러난 반면 공인본은 이러한 흔적이 관찰되지 않고 얇은 글자 형태가 나타났다. 최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공인본이 삼성본과 다른 인쇄 기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주장했다. 유우식(공학박사)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도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 픽맨(PicMan)을 이용해 공인본과 삼성본의 전엽과 후엽 반곽의 크기를 측정한 결과 두 판본의 글자 이미지가 크게 차이 난다는 점을 확인하고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견해를 폈다. 하지만 서지학계에서는 이를 금속활자본이라고 판단할 결정적인 증거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해 책이 제작된 시기를 확인하자는 의견도 제기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방사선을 이용해 유물 또는 유해의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물체에 잔존하는 방사성 탄소의 농도를 측정해 그 생명이 소멸한 연대를 산출한다.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연대를 1239년으로, 목판본이라고 주장하는 서지학계는 1470년대 이후로 추정하고 있어 20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자원분석센터 홍완 연구원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할 때 오차 범위를 표기하고 있으며, 1000년 이내의 유물은 오차 범위가 수십 년 이하일 확률이 95% 정도”라고 말했다.

반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신뢰성을 문제 삼으며 측정 오차 범위와 시료의 오염, 파괴 분석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특히 연대를 측정하더라도 책의 제작연도가 금속활자본인지 목판본인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밝혀내려는 과학적 접근 방법들이 있었으나 학계 안팎에서는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싱크트론 방사 엑스선 분광분석 장비를 이용해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춘추좌씨전' 에서 금속 성분을 검출했다. 출처=[GIZMODO].

최근 주목받는 ‘고출력 엑스선 형광 분광분석법’은 고출력 엑스선 분광분석법을 통해 금속 원소를 검출·스캔하는 연구 방법으로,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링 모양의 입자 가속기인 SLAC의 싱크로트론을 사용해 문서의 잉크에서 금속 성분을 검출할 수 있다. 해당 연구는 2022년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와 미국 유타대학의 공동연구 프로젝트인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From Jikji to Gutenberg)’가 출범하면서 조명받았다.

유네스코·미 유타대 프로젝트에 25개 기관 석학 50여 명 동참

이미지 분석·탄소연대측정 등은 금속활자본 직접 증거 못돼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는 첨단 과학기술이 접목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인쇄술과 활자술의 기원과 원리 등을 구명하고 동서양의 포괄적인 인쇄 문화를 조명하는 국제 연구프로젝트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박물관과 유네스코 사무국을 비롯해 미국 프린스턴대학 도서관, 의회도서관 등 25개 기관의 과학·인문학 분야 석학 50여 명이 참여한다. ‘직지’ 간행 650주년인 2027년에는 순회 전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과학적 연구 분석을 위해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의 고출력 엑스선 형광 분석 등을 통해 금속활자 여부를 판별할 명확한 과학적 증거를 발견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의 실험에서는 고서에 어떤 원소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지 측정한 후 원소별로 이미지를 합성해 금속 성분의 농도분포를 확인한다. 현재 국내를 비롯한 다른 연구소의 장비로는 극미량의 금속 원소만 검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엑스선을 투사하는 영역이 넓어 글자 모양으로 금속 성분을 찾아낼 수 없다. 국립가속기연구소의 ‘싱크로트론 방사 엑스선 분광분석 장비’(Synchrotron Radiation X-Ray Fluorescence Spectrometry)는 고서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극미량의 금속 원소를 검출하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첨단기기로 평가받는다. 앞선 2022년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 프로젝트 출범을 맞아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춘추좌씨전’ 등을 의뢰한 결과 금속 성분이 검출된 바 있다.

서지학자인 남권희 경북대 명예교수는 “2022년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에 조선시대 목판본과 금속활자본 연구를 의뢰했다”며 “목판본에서는 금속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반면 금속활자본의 잉크에서는 금속 성분이 다량 검출됐다”고 밝혀 금속 성분 검출 여부가 금속활자본임을 판별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인정했다. 최태호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도 “기존에 시도된 이미지 분석 방법 등으로는 공인본이 목판본과 다른 인쇄 기법으로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금속활자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며 “공인본에서 금속 성분이 검출된다면 금속활자본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 안팎 “금속 성분 검출이 곧 금속활자본의 증거”

‘춘추좌씨전’서 금속 성분 추출···내년 상반기 공인본 의뢰 예정

‘남명증도가’ 공인본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어 문화유산법 제39조에 따라 국외 반출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해당 법률이 올해 2월 13일 개정돼 내년 1월 24일부터 조사·연구 등을 목적으로 문화유산 보호시설을 갖춘 기관에 한해 국가유산청장의 허가를 얻으면 반출이 가능하게 됐다. 문화유산 보존 및 연구에 집중하게 될 세보재단 창립준비위원회는 내년 상반기 중으로 ‘남명증도가’ 공인본과 ‘자비도량참법집해’의 소유권을 이전하고 스탠퍼드대학에 의뢰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스탠퍼드대학 국립가속기연구소의 ‘고출력 엑스선 형광 분광분석법’이 학계 안팎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과학적 검증 방법으로 떠오른 만큼 해당 고서들의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남명증도가’ 공인본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도 종식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재령 인턴기자 jjrabbit@beopbo.com

[1754호 / 2024년 1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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