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학계는 초미 관심··· 국내학계는 모르쇠 일관

2024-11-28     오재령 인턴기자

 

[기획] 다시 불붙는 최고 금속활자본 논쟁 

1.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 ‘직지’ 맞나
2. ‘남명증도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
3. 과학 영역으로 넘어가는 금속활자본
4. 금속활자본 논쟁의 걸림돌들

 

근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하 남명증도가)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주장한 논문이 해외 학술지에 잇달아 게재되면서 해외학계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유우식(공학박사)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은 2022년 스위스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헤리티지(Heritage)’에 논문 ‘The World’s Oldest Book Printed by Movable Metal Type in Korea in 1239: The Song of Enlightenment’(1239년 한국에서 인쇄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증도가)를 게재했다. ‘헤리티지’는 세계적인 학술 데이터베이스 스코퍼스(SCOPUS) 등재지로, 논문 인용지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9개월만에 유 연구원의 ‘남명증도가’를 구명한 영문 논문 4편이 이곳에 실렸으며 모두 최다 접속 1위 논문에 올라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헤리티지’에 실린 그의 논문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으로 주목받으며 전 세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논문의 최상단에 게재됐고, 열람 횟수는 18000여 회에 이른다.

국제학술지 ‘헤리티지(Heritage)’에 게재된 '남명증도가'를 금속활자본으로 구명한 논문 초록.

유 연구원의 논문은 올해 11월 30일 캐나다 레스브리지대학(University of Lethbridge)에서 발행하는 인문학 분야 학술지인 ‘디지털 스터디즈(Digital Studies)’에도 소개될 예정이다. 이처럼 ‘직지’보다 앞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의 존재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학계는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나 토론 과정 없이 ‘남명증도가’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이 아니라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헤리티지' 등 유수 국제학술지에 '남명증도가' 관련 논문 게재

국내학계는 26차례 논문 게재 거부·전 항목 0점 처리 하기도 

금속활자는 당대의 첨단 반도체라고 할 만큼 지식 보급에 있어 획기적이었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발견은 한국을 인쇄종주국의 위치에 올려놨다. 하지만 근래 금속활자본 연구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퇴색하고 고정관념과 헤게모니에 좌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직지’ 외에 고려 시대 금속활자본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제기돼왔지만 서지학계는 여전히 가능성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유 연구원이 처음부터 해외학계에 연구 논문을 발표한 것은 아니다. 그는 2021년부터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여러 차례 투고했지만 26차례 게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심지어 2022년 9월 모 학술지에 투고한 영문 논문 ‘Unvelling Birth of the World’s First Metal-Type-Printed Buddhist Text in 1239 : The Song of Enlightenment’는 평가표의 모든 항목에서 0점 처리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제목이 원고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한글요약이 원고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참고문헌에 원고에 인용된 문헌들이 모두 소개되어 있습니까?’ 등의 질문에서 심사자가 0점을 준 것이다. 이는 학계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로, 학문적 평가와는 동떨어진 감정적인 평가라는 지적이다. 국내에서 금속활자본의 존재를 밝혀낼 길이 요원하다고 받아들인 그는 해외학계로 눈을 돌렸다. 2019년 유럽재료과학회 문화유산연구분야 학술대회에서 유 연구원의 논문 발표를 듣고 2021년 ‘헤리티지’에서 그에게 투고를 요청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논문은 유 연구원의 요청에 따라 전액 면제를 조건으로 출판됐다. 자비를 들여 논문을 출판했다는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캐나다 레스브리지대학(University of Lethbridge)에서 발행하는 인문학 분야 학술지인 ‘디지털 스터디즈(Digital Studies)’에 게재 예정인 '남명증도가'를 금속활자본으로 구명한 논문 초록.

유 연구원은 이후에도 최신 이미지 분석 기법을 이용해 ‘남명증도가’ 공인본이 다른 판본과 구별되는 금속활자본임을 구명하는 연구에 집중해왔다. 그의 연구는 해외에서 잇달아 성과를 인정받았다. 2023년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아시아학회(AA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에 논문을 게재하고 같은 해 미국인쇄협회는 세계인쇄역사연표에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을 ‘직지’에서 ‘남명증도가’(1239년)로 수정했다. 올해 2월에는 일본 도쿄외국어대학 조선어학부 교수를 역임한 간노 히로오미의 추도학술논집에 논문을 발표했다. 국내학계에서 0점을 받아 거부됐던 그의 논문도 12월 영국 역사저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BROAD(British Reading Oasis and Discovery)’ 창간호에 게재가 확정됐다.

 "이해관계·고정관념에 얽매였다" 국내학계 향한 일침

금속활자본 가능성 열어두고 면밀한 검토·토론 필요

국내 서지학계가 학문적 개방성이 부족하고 ‘주류’ 학자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논문 자체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공자냐 비전공자냐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남명증도가’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에 대해 몇몇 서지학자들은  "비전공자의 아전인수식 감정"  “연구자로서 기본 소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잘못된 지식을 유포하고 후학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 우려스럽다”  등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직지’와 관련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다른 금속활자본의 존재를 꺼리는 이유라는 의견도 있다.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시는 ‘직지’를 관광 상품으로 내세우며 직지문화축제를 여는 등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협업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22년에는 국제 연구 프로젝트인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가 출범해 2027년 세계 순회 전시를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직지’보다 앞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는 ‘직지 알리기’에 많은 예산과 시간을 쏟아부은 국내 지자체와 ‘직지’를 지지하는 일부 서지학자들에게는 불편한 소식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중진 서지학자들은 그간 제기돼온 ‘남명증도가’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들은 비약이 심하고 금속활자본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직지’ 또한 프랑스에서 재조명된 이후 서구학계에서 금속활자본임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해외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연구를 외면한 채 국내학계의 연구 결과만을 고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직지’는 ‘진실을 바로 가리켜 보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해관계나 고정관념에 얽매여 새로운 금속활자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직지’의 정신과도 맞지 않다. ‘남명증도가’ 공인본은 스탠퍼드대학에 금속 성분 검출 의뢰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신뢰받는 ‘고출력 엑스선 형광 분광분석법’을 통해 공인본은 목판본으로 확인될 수도 있지만 금속활자본으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서지학계는 거대한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학문적 신뢰도 잃을 수 있다. ‘남명증도가’ 공인본의 분석 결과에 따라 세계 최고금속활자본 여부가 밝혀지기에 앞서 그 존재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학계에서 활발히 검토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다.

오재령 인턴기자 jjrabbit@beopbo.com

[1755호 / 2024년 1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