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중창불사
10년 중창불사 이끌어 피폐한 백양사 대가람으로 일신 잡역·수탈·홍수·화재 잇따르며 극락보전과 요사채만 남아 1917년, 10개년 대중창 불사 계획 수립 후 본격적인 불사 만암 스님 권선에 대중들 적극 동참…대가람 면모 되찾아
만암 스님이 출가했을 때 백양사에는 낡은 극락보전과 요사채 등 허름한 건물 몇 동이 전부였다. 백양사는 개산 이후 성쇠를 거듭했지만 이렇게까지 쇠락한 적은 없었다. 조선전기 억불정책에도 미타전·대장전·동협장당·승당·종루전·식당 등 20여 동의 전각이 있을 정도의 사세(寺勢)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잡역과 공물, 지방 양반들의 수탈이 잇따르면서 더는 견뎌내기 어려웠다. 전각을 보수할 여력도 인력도 없었다. 절은 빠르게 피폐해졌다. 철종 11년(1860) 관부(官府)에서 백양사 승역(僧役)을 감면하고 침탈을 금지함에 따라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백양사가 수탈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수마(水魔)가 덮쳐왔다. 1864년 여름 전남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장마철이면 으레 오는 비겠거니 여겼으나 며칠이 지나도 빗줄기는 약해지지 않았다. 집들이 휩쓸려 내려갔고 곳곳에서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종1년 7월 30일에는 ‘영광군의 수재를 당해 익사한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8월 3일에도 ‘나주·영암 등 고을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을 베풀다’고 적혀있다. 휼전(恤典)은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해 내리는 식량 등 특전을 일컫는다.
이때의 홍수로 백양사 전각들이 폭우에 휩쓸려 가는 등 피해가 막대했다. 퇴락한 백양사는 그마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고려 각진국사가 창건하고 정도전, 정몽주, 이색 등 수많은 명사가 시를 썼던 쌍계루도 무너져 내렸다. 당시 주지였던 도암인정(道巖印定, 1805~1883) 스님이 복원에 나섰다. 물길을 피해 쌍계루 서쪽에 새로이 백양사 터를 잡았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천년고찰로서의 사격은 회복할 수 있었다. 불사를 마친 도암 스님은 다시 수행자로 돌아가 백암산 백학봉 석실에서 두문불출하며 ‘뜰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다 입적했다.
백양사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해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에 이번에는 화마가 덮쳤다. 도암 스님의 주도로 복원됐던 대다수 건물이 다시 잿더미가 됐다. 덕송·보경·응운·금해 스님 등이 중창에 힘을 쏟았으나 옛 모습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운문암·청류암 등 말사의 규모가 백양사를 능가했다.
만암 스님은 산문에 든 뒤 백양사가 호남을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터다. 어린 만암 스님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 스님들의 목소리에 탄식과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음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언젠가 백양사를 다시 최고의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는 했으리라.
1916년 7월, 만암 스님이 환응 스님의 뒤를 이어 백양사 주지를 맡을 때도 경내에는 건물이 서너 동에 불과했다. 주지가 된 만암 스님이 첫 사업으로 착수한 것이 중창불사였다. 백양사가 옛 사격을 되찾을 때 수행·교육·포교가 크게 진작되고, 지역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이 높아지리라 보았다. 무엇보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이래 점차 쪼그라들던 스님과 불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스님은 먼저 대중들의 공의를 얻는 데 주력했다. 무작정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사찰 복원의 성공 여부는 대중의 마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암 스님은 문중의 어른 스님들과 말사 주지, 도반들을 찾아다니며 불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함께 힘을 모아 백양사의 장엄한 옛 모습을 되찾자고 설득했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머물고 싶어 하는 최고의 수행도량, 승풍이 살아 숨 쉬는 모범도량을 만들자고 했다.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만암 스님의 확신에 찬 얘기를 듣고 나면 얼굴에 환희심이 번져갔고, 신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만암 스님이 강원 강사로, 수행자로, 광성의숙 학감으로, 주지 직무대행으로서 보여준 성실함과 열정, 어떤 경우라도 계율에 철저했던 ‘출가자다움’에서 오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마음을 낸 것은 학산성운(鶴山性雲, 1854~1929) 스님이었다. 14세에 백양사로 출가해 강원에서 사집 과정을 마친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 쌍계사 칠불암, 금강산 마하연 등 선방에서 정진한 선승이었다. 신심이 깊고 검박했던 학산 스님은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고 나물을 캐 연명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스님도 유서 깊은 호남의 명찰이 황폐해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만암 스님의 불사 계획을 들은 학산 스님은 적극 동참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앞서 자신도 백양사 주지를 지내며 마음은 있었으나 실질적인 복원 불사를 이루지는 못했다. 광성의숙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던 학산 스님은 오랫동안 만암 스님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면서 만암 스님이라면 중창불사를 반드시 해내리라 믿었다. 학산 스님은 “내 숙원도 백양사 복원이라네. 이걸로 기초를 삼아 대사(大寺, 백양사)의 옛 모습을 되찾아 주시게나”라며 불사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거금 2000원을 희사했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 원에 해당했다. 산내 노장이 불사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러자 본말사 스님들도 속속 참여했다. 이렇게 모인 정재(淨財)가 6개월 만에 5000~6000원에 이르렀다. 당시 궁핍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1917년 2월 만암 스님은 10개년 대중창 불사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불사에 착수했다. 첫 시작은 대웅전이었다. 한산했던 절이 목수와 인부들의 발길로 분주해졌다. 스님은 전라도 각 지역을 다니며 백양사 불사에 동참할 것을 권선했다. 불사 소식을 전해 들은 수많은 불자가 십시일반 동참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4~5만원의 불사금을 모을 수 있었다.
1918년 이만총이 나반존자의 소상을 조성하고, 박석초·김관하는 신중탱화를 그렸다. 우화루와 청운당이 들어서고 명부전 중창도 완성됐다. 시간이 지나며 대웅전도 서서히 위용을 드러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빼어난 절경의 백학봉이 대웅전 뒤쪽으로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건물 내부는 우물천정 형식으로 석가·문수·보현의 삼존상이 봉안됐다. 아난과 가섭상, 시자상 2위, 나한상 23위, 독성상, 인왕상 2위 등이 차례로 봉안됐다. 불상 뒤로는 1922년 화승(畵僧) 봉영 스님이 그린 영산회상도와 제석천룡탱화가 걸렸고, 양회암이 조성한 석조 석가불입상을 대웅전에 봉안했다. 또 중국 상해에서 대장경 413책을 구입한 뒤 비치해 학인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참선 수행자들을 위한 운문선원을 개원했다. 교학 연찬과 눈 밝은 명안종사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것이다. 백양사가 서서히 옛 위용을 되찾아갔다.
대웅전 낙성식은 1922년 5월 4일 거행됐다. 불사를 시작한 지 5년여 지났을 때였다. ‘매일신보’ 1922년 5월 11일자에 따르면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열린 대웅전 낙성식에는 수만 명의 불자와 관람객이 동참했다. 인산인해(人山人海)라는 말처럼 백양사는 사람들로 산과 바다를 이루었다. 지역유지들과 저명인사들도 대거 참여했다. 본행사가 끝난 뒤 광주에서 초청해 온 전통악기 연주자들의 신명 나는 음악과 다채로운 행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백양사의 변화에 놀라워하며 만암 스님을 찬탄했다.
대웅전 낙성과 함께 나머지 중창불사도 차근차근 진행됐다. 1925년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한 8층 석탑을 대웅전 뒤편에 조성했다. 사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연꽃 문양으로 장식한 돌기둥 4개를 올려 기단부를 구성했다. 사리탑 주위에 8개의 돌기둥을 세워 각 면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 수행해야 하는 팔정도 항목을 하나하나 새겨넣었다. 탑에 봉안한 진신사리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였던 용성 스님이 받들어 모시다가, 만암 스님의 곡진한 요청을 받아들여 기증했다. 만암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사리탑을 조성하게 된 연유를 밝힌 ‘백암산 백양사불사리탑비명병서’를 직접 쓰고 탑비도 세웠다. 또 대종(大鐘)·금고(金鼓)·운판(雲板)을 새롭게 주조하고, 석가삼존불, 16나한상, 양대 금강역사상을 차례차례 봉안했다. 이때 일광정과 중화당도 건립했다.
1927년에는 마침내 10개년 대중창 불사가 마무리됐다. 그동안 대웅전·일주문·천왕문·범종각·조사전·명부전·칠성각·만세루·사리탑·요사 등이 들어섰다. 전각 모두를 합치면 170여 칸으로 백양사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만암 스님은 큰 불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백양사 사적비를 세웠다. 일주문에는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쓴 ‘大伽藍白羊寺(대가람백양사)’라는 큼직한 현판을 내걸었다. ‘선교양종대본산’ ‘판교대본산’ ‘선종대본산’ ‘불교대본산’ ‘법찰대본산’ 등 현판을 내건 다른 사찰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만암 스님은 ‘대본산(大本山)’보다는 ‘대가람(大伽藍)’을 선호했다. ‘대가람’이라는 말에는 위압적이지도, 직설적이지도 않으면서 선교양종을 모두 아우른다고 보았다. 동시에 ‘대가람’은 쇠락했던 백양사가 마침내 대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는 대중들의 자긍심을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만암 스님은 백양사의 면모를 일신한 대중창 불사의 완성자였다. 세상은 만암 스님을 호남불교를 넘어 이제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끌 불교 지도자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56호 / 2024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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