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없으면 사찰도 없다

초하루도 한두 명 남짓 사찰 존폐 위기에 몰려 고통서 벗어나는 수행이 자신과 불교 지키는 길

2024-12-13     법보

​사원의 규모도 비교적 작지 않고 도회지 인근에 있는 전통사찰인데 초하루 법회 참석 인원이 2명뿐이란다. 요즘 지방 사찰에는 초하루에 한 명도 신도가 오지 않는 절도 적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10여 년도 더 된 것 같다. 물론 더 한 곳도 있을 것이다.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은 인구 절벽 시대에 너무나 당연하다. 거기다가 비교적 물질의 궁핍함이 적은 요즘, 세상의 즐거움을 내려놓고 고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수행자의 길에 들어서는 이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하다.

미래에도 우리 사회에 사찰과 불교가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 이전에는 국가에서 주는 도첩을 받고 국가나 왕실의 안녕을 기도하는 존재, 즉 사제로 오랫동안 존속해 왔다. 그 유습은 현대까지 불교가 사회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교 국가의 핵심 의례였던 제례의 대행과 인력으로 넘기 어려운 재앙의 해결자로서 불교는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 역할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전통사회의 문화였던 제례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변하므로 불교의 역할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불교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과학이나 기술 등으로만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난망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이는 세상의 본질도 바르게 알기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업연의 세계를 어찌 쉽게 알 수 있을까. 고도로 발달한 현대 의학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이었다. 평소 아픔이나 전조증상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던 집안 조카가 심정지가 와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교라고 해서 갑자기 불어닥친 난관을 해소하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 의학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불교가, 불자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무상하다는 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의 양상을 분명히 읽는 힘을 길러 무상과 무아를 진리로 체득해서 대처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단생(單生)의 사고가 아니라 다생(多生)의 윤회적 세계관으로, 변화를 바로 인지하여 대처함으로써 유위를 뛰어넘어 고통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닥쳐오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흔들림 없이 고통의 삶을 뛰어넘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가 하고 있고, 걸어가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결론은 간명하다. 불교로 사고하며 자신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몸을 지키는 호신,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이 진언을 염송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최상의 답은 아닐 것이다. 정답은, 나와 세상을 바로 보며, 늘 깨어 있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밖에 없다.

​수행하지 않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불교가 없으면 사찰이 존재할 이유는 더욱 없다. 나를 닦는 수행이 없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불교의 근거지인 사찰은 존속의 명분을 잃고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불교의 수행은 경전을 보고, 염불하고, 참선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바로 멈춤이고, 바르게 살핌이다. 멈춤은 삼매의 다른 말이다. 멈춤은 욕망에서 멈추는 것이고, 비운 마음으로 편견 없이 바르게 나의 마음과 세상을 바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 힘이 정력(定力)이고 관력(觀力)이다. 정력과 관력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찾아 해소함으로써 소원의 충족을 위해 찾아오는 불자를 도울 수 있게 된다. 결론은 간단하다.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 없으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이성운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1757호 / 2024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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