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사 수안 스님

부처와 중생은 손바닥·손등처럼 서로를 떠나 존재할 수 없어 너무 아프게 느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지독한 집착 나와 너 생각이 다른 것은 다양성일 뿐 어느 한쪽이 틀린 것 아냐 부처·중생, 한 번도 분리된 적 없어…각자 역할 안 하면 의미 없어 

2025-01-27     정리=신용훈 호남주재기자

전북 불교대학 동계특강에 참여해 주신 분들 너무나 반갑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아니라 노래와 함께하는 강의입니다.

김광석 노래 중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류근 시인이 가사를 쓰고 김광석 씨가 곡을 붙인 거죠. 시를 쓸 때 류근 시인은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반의 나이였습니다. 일찍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시만 써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답니다. 주변에서 노래 가사를 한번 써보라고, 그게 돈이 된다고 해서 노래 가사를 몇 개 썼답니다. 그런데 작곡가들이 보고 “너무 진부하고 노랫말 같지가 않다”라며 많이 외면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노랫말이 녹음실에 그냥 널브러져 있는 걸 김광석 씨가 본 거예요. 김광석 씨가 읽어보고 “이거 누가 쓴 거냐” 하니, “류근이라는 시인이 썼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시인과 만나서 이 시에다가 자기가 곡을 붙여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입니다.

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하면 당연히 아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세상의 모든 결과물이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에 분명히 여러 가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는 건 지나친 거잖아요. 사랑하다 보면 마음이 아플 수도 있고 힘들 때도 있어요. 류근 시인은 “너무 아프게 느껴지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고 집착의 결과물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받는 입장에서 그게 부담이 된다면 결국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보통은 우리가 살면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나와 다른 게 당연하다. 틀린 게 아니야, 그렇죠? 나는 맞고 넌 틀렸어. 그게 아니고 내 생각하고 네 생각이 다른 거야. 분명히 그건 살면서 많이 느끼잖아요.

저는 매운 음식을 못 먹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운 걸 나쁘다고 얘기하지 않아요. 그냥 제가 못 먹을 뿐이에요. 매운 게 잘못된 건 아니거든요. 또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취향일 뿐이란 말이죠. 세상은 참 다른 것들이 서로 어우러졌기 때문에 사실은 돌아가고 유지가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제가 이제 여러분께 재미있는 문제를 하나 낼게요. 뭐냐 하면 여기 손바닥이 있습니다. 이 손바닥에서 빛을 앞으로 쫙 쏩니다. 가장 멀리 닿는 곳이 어디일까요? 손바닥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디일까요? 정답은 손등입니다. 빛을 아무리 앞으로 멀리 쏴도 우주 끝까지 가도 손등에는 안 가요. 그렇죠. 손등에 닿으려면 빛이 이렇게 뒤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손바닥에서 가장 먼 곳은 손등입니다. 두 번째 문제, 그러면 손바닥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요? 손등이죠. 이건 뭐 너무 쉽죠.

방금 제시한 두 문제는 서로 정반대지만 두 문제의 답은 똑같이 손등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통은 문제가 다르면 답도 달라야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서로 정반대인데 답이 같아요. 이걸 부처님께서 딱 세 글자로 뭐라고 그러시는 줄 알아요. 불이법(不二法). 손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걸 합쳐서 손이라고 해요. 여기서 손바닥을 움직이지 않고 손등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반대로 손등을 움직이지 않고 손등으로 물건을 잡을 수 있을까요? 손바닥으로 잡아야 합니다. 손바닥이 일을 다 하는 것 같죠. 그런데 손등을 안 움직이고 손등이 “나 그럼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나 귀찮게 하지 마. 나 가만히 있을 거야”라고 하면 어떨까요? 손바닥 혼자 다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손을 못 써요. 손등이 따라서 움직여 줘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분명히 손바닥과 손등을 나눠 이야기하지만 이 둘은 한 번도 마주 본 적이 없는데, 한 번도 떨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닙니다. 부처와 중생은 분명히 둘로 나누어지지만 한 번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어요.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부처의 역할, 중생의 역할. 그런데 그 역할도 중생이 중생 역할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부처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러 사람이 중식당에 가서 주문합니다. “나는 짬뽕.” 다른 거 시키면 “통일시켜. 그래야 빨리 나오지.” 이런 말이 나오죠. 먹고 싶은 것이 다 다를 텐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 주장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게 하려다 보면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불편한 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달라서 오히려 다행이더라.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하고 다 같다면, 여러분들이 저하고 마음이 같다면 다 머리 깎고 출가했을 거예요. 신도는 누가 해요? 다 앞에 나가서 목탁 치고 딱 법문하고 있으면 듣는 사람 아무도 없고요.

또 다른 예는, 제가 주지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지만 기도 시간에 특히 수능 기도 시간에 이런 예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나기는 했지만, 수능 기도하시는 분들이 또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수능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건 모든 기도에 사실은 통용이 되는 부분인데, 수능 기도하시는 분 중에도 제가 매번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내 자식만 합격하게 해주세요”는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 자식들은 떨어지게 해도 돼요”라는 말과 같아요. 내 자식이 합격하려면 다른 사람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습니다. 붙는 사람이 있으면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거예요.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면 실패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죠. 그러면 나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건 누군가의 실패를 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그럴 때는 무조건 합격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하고 단 그 결과에 만족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결국 인과의 법칙입니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한 행위에 의해 결과가 나오게 되는 거죠. 잘했으면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고, 잘하지 못했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힘들게 했던 사람들, 여러분들의 마음을 몰라줘서 서운하게 생각했던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과 같지 않고, 또 내 마음을 몰라줘서 억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얘기도 많이 합니다. 저 사람 참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괜히 힘들게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남을 속이고 사기 치고 뺏고 이러는데 잘 산다고요. 일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는 인과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삶을 살아오며 분명히 경험했고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그 인과는 과거·현재·미래 3세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언젠가는 자기 책임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스스로 감당하게 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사상 초유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래도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다 진짜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 “몇십 년 뒤로 후퇴하는 거 아니냐” 그런 걱정들도 많이 하지만 끝내 정상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희망은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희망은 어디 가서 찾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포기하지 말고 그 희망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봄을 찾으러 아주 먼 길을 떠났습니다. 봄을 찾으러 떠났다가 봄을 찾지는 못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활짝 핀 매화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봄이 바로 집 마당에 있었구나.” 부처는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이렇게 내 안에, 내 옆에 있습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불합시다.

정리=신용훈 기자 boori13@beopbo.com

이 법문은 전남 영암 지장사 주지 수암 스님이 2025년 1월 19일 전북불교대학에서 제1차 동계특강 한 내용을 정리한 겁니다.

[1763호 / 2025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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