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앙불교계로
교육자로서 역량 발휘…불교교육 근대화와 체계 확립에 주력 광성의숙 학감 맡은 후 위상 높아지고 행정가로서도 두각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에 선출돼 중앙학림 설립 등 기여 학무부장·교육부장 등도 역임…교육자로서 능력 인정받아
만암 스님은 백양사 주지를 맡는 동안에도 한 사찰에 국한된 지도자만은 아니었다. 스님의 관심은 백양사를 넘어 한국 불교계 전반에 걸쳐 있었다. 불교를 비롯한 각계 지도자들과 교류하고 변화를 주도하며, 불교계를 조직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신념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만암 스님이 대외 활동을 본격화한 1910~20년대는 한국 사회가 격심한 변화를 겪고 있었으며 일제의 지배력은 점점 강화됐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위상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여서, 각 종교마다 새로운 신자 확보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
1927년 3월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제20집에 따르면, 조선의 전체 인구는 약 1800만명이었다. 이 가운데 특정 종교 신자임을 밝힌 종교인구는 67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3.7%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수치를 살펴보면 불교 14만1000명, 기독교 32만1000명, 천도교 계통 19만9800명, 비천도교 계통 신도가 7317명이었다. 근대기 종교계 현황과 변화를 연구한 종교학자 이창익 박사는 기독교 32만1000명 중 천주교 신도는 8~9만 명 내외였고, 장로회와 감리회 소속 개신교 신도 수가 20만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통계자료는 신흥종교 신도가 전체 종교인구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활발했으며, 반면 이 땅에서 1600년 역사를 함께한 불교의 교세는 극히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 신도 수는 개신교 신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신흥종교인 천도교 신도보다도 훨씬 적었다. 기독교는 서구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교육, 의료, 복지 사업을 활발히 펼치며 신도 수를 급격히 늘려갈 수 있었다. 천도교도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웠으며,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과 결합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넓혀갔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계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인 교육과 교단의 정비 없이 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개혁 성향의 스님들은 불교 교육과 제도 개혁에 집중하며 불교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만암 스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스님의 활동 반경이 넓어진 것은 1907년 해인사 강단에 서면서부터였다. 당시 “남북 강원의 여러 강백 가운데 명성이 가장 자자했다”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스님은 학승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어 광성의숙 학감을 맡아 교육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던 만암 스님의 관심은 단순한 학문 전수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불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교육기관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자 했으며, 이는 훗날 불교전수학교 및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됐다.
만암 스님은 1912년 백양사 주지 환응 스님을 보좌하면서부터 행정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환응 스님의 강맥(講脈)과 계맥(戒脈)을 이은 만암 스님은 일체 산문 밖을 나서지 않던 스승을 대신해 대외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사찰 운영뿐 아니라 불교계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며 불교계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15년 1월, 경성 각황사에서 열린 30대본산주지회의원 정기총회에서 만암 스님은 상치원(常置員)으로 선출됐다. 30대본산주지회의원은 일제강점기 불교계가 30개 교구본사 체제를 시행되면서 주요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이었다. 총회에서는 각 본사 간 긴밀한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30본산연합사무소를 출범하고,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 설립과 ‘불교진흥회월보’ 간행 등에 대한 결의가 이뤄졌다. 당시 백양사 주지였던 환응 스님을 대신해 참석한 만암 스님은 7명의 상치원 중 본사 주지가 아닌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때 오랜 세월 불교계의 대소사를 논의했던 일생의 도반 구하 스님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만암 스님은 통도사 주지였던 구하(1872~1965) 스님과 함께 상치원으로 활동하며 교분을 이어갔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만암 스님이 통도사를 직접 방문하는가 하면 훗날 우리나라 선종의 시조인 신라 도의국사의 진영을 모신 백양사 도의영당(道義影堂)이 한국전쟁으로 훼손됐을 때 만암 스님의 부탁으로 구하 스님이 직접 현판의 글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 속에서 1917년 30본산연합사무소의 위원장이 용주사 주지 대련 스님에서 통도사 주지 구하 스님으로 교체됐다. 그 과정에서 구하 스님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면서 만암 스님 역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1921년 1월 11일 열린 30본산주지총회에서는 종무 체계를 새롭게 정비하고, 종무원 임원을 새로 선임했다. 종무원장은 월정사 보룡 스님이었으며, 총무부장에 통도사 구하 스님, 서무부장에 용주사 대련 스님, 교무부장에 유정사 일운 스님, 재무부장에 봉은사 상숙 스님 등이 임명됐다. 만암 스님은 학술업무를 총괄하는 학무부장으로 발탁됐다. 이는 스님의 교학적 역량과 교육자로서 능력이 불교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3년 3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설립되면서 만암 스님은 26명의 주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이어 1926년 3월 열린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제4회 평의원회 총회에서는 보성고등보통학교 인수와 불교전문학교 건설 등이 주요 안건으로 결의됐다. 이때에도 만암 스님은 7명의 이사 중 한 명으로 선출됐으며, 1932년까지 7년간 중앙교무원 이사직을 연임하며 중앙불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1927년 말부터 1930년 11월까지는 백양사 주지직을 잠시 내려놓고 경성 각황사에 머물며 교육과 교단 정비에 매진했다.
그 무렵 불교계에서도 변화의 흐름이 더욱 뚜렷해졌다. 1929년 1월 3일 조선불교승려대회에 경성 소속 회원으로 참석한 만암 스님은 새롭게 만들어진 교무원 체제에 따라 종헌, 교무원원칙, 교정법, 법규위원회법, 승니법칙 등을 제정했다. 불교를 대표할 교정(敎正)으로 백양사 환응 스님과 오대산 한암 스님 등 7명을 선임했으며, 만암 스님은 교무원 임원인 교학부장으로 선출됐다. 중앙학림 설립을 담당한 상치원에 이어 종무원과 교무원 체제에서 만암 스님이 학무부장과 교학부장을 맡게 된 것은 학문에 두루 조예가 깊고 교육에 대한 전문성과 운영 능력에 있어 뛰어난 평가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만암 스님은 중앙불교계에서 주요 지도자로 자리 잡게 된다. 스님은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며 불교교육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중앙불교계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통해 불교의 조직적 개혁을 추진하고, 보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스님은 단순히 한 사찰의 운영자가 아니라 한국 불교 전반을 아우르는 지도자로서, 불교계를 보다 근대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만암 스님의 중앙불교계 진출은 한국 불교의 자립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스님은 불교 교육의 현대화, 불교 조직의 정비, 그리고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의 탄압 속에서도 불교계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하며, 불교계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님의 이러한 업적은 오늘날에도 한국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암 스님의 행보는 단순한 사찰 운영을 넘어 한국 불교를 근대적으로 정비하고자 했던 선각자의 길이었다.
이재형 법보신문 대표 mitra@beopbo.com
[1766호 / 2025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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