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920년도의 종교 및 유사종교 신자 수 통계

자발적 미신자가 총인구의 81.5% 당시 종교 인구는 약 5~6% 각 종교계 미신자 확보 경합 기독교 학교·병원 적극 활용 천도교 등 ‘유사종교’도 활발

2025-03-07     이창익 교수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백여 년 전에 근대 종교는 사회 안에서 매우 협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종교학자들은 전통적인 학(學), 교(敎), 도(道), 술(術)의 범주가 근대적인 ‘종교 개념’으로 대체되거나 변용되었다는 식의 관성적인 주장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러나 근대적인 ‘종교 개념’은 기존의 모든 종교적 자산을 새롭게 코딩(coding)하여 재배치하고 있었다. 공인종교, 유사종교, 무속, 미신은 모두 근대적인 종교 개념으로 코딩된 범주였다.

1920년 말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총인구에서 공인종교 신자는 약 4%(67만 8043명)에 머물렀고, 자발적인 미신자는 총인구의 약 81.5%에 달했다. 신자 확보는 모든 종교의 성쇠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항이다. 따라서 특히 기독교의 각 교파와 종파는 미신자 흡수를 위해 학교를 세워 청년 교육에 매진했다. 1920년 말에 종교계 사립학교는 279개교였고 생도는 2만 9746명이었다. 청년 학생은 장래에 부모·형제, 부처(夫妻), 자식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종교적 자산이었다. 또한 병원 설립 등을 통한 자선사업도 미신자를 유혹하는 중요 기관이었다. 다만 불교와 신도는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한 미신자 흡수에 미온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총인구의 81.5%에 달한 자발적인 미신자 인구에는 종교유사단체의 신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유사단체로는 ① 새로운 교의를 세워 기독교에 대항한 동학(東學)에서 유래하는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 ② 태초의 신인(神人)을 숭경하고 그 전교(傳敎)를 담은 경전에 의탁하던 단군교(檀君敎)와 대종교(大倧敎), ③ 하늘의 성수(星宿)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예언한다고 믿고, 여기에 불설(佛說)과 노장(老莊)의 학설을 가미한 태을교(太乙敎)와 청림교(靑林敎), ④ 공자(孔子)의 언설을 따르고 선전하던 공자교(孔子敎)와 태극교(太極敎) 등이 있었다.

종교유사단체, 즉 유사종교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자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교의의 선전 이외에 정치적 활동이나 항쟁 등에 참여하곤 했기 때문에 공인종교단체에서 배제되었다. 따라서 유사종교는 1915년 10월부터 시행된 ‘포교규칙’이 아니라 1912년 4월부터 시행된 ‘경찰범처벌규칙’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신자를 결집시키는 종교유사단체의 힘은 공인종교에 못지않았다. 특히 천도교는 신자의 자제를 교육하여 교파의 계승자가 끊기지 않게 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불교, 기독교, 신도의 공인종교는 80% 이상의 미신자를 두고 종교유사단체와 경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 말에 종교유사단체의 신자 수는 천도교 12만 5445명, 시천교 2만 9978명, 단군교 329명, 대종교 351명, 태을교 749명, 청림교 652명, 공자교 272명, 태극교 1354명이었다. 즉 이상의 8개 종교유사단체의 신자 수만도 총 15만 9130명이었다. 8개 종교유사단체의 신자는 공인종교의 약 23.5%, 전체 인구의 약 0.9%에 달했다. 공인종교와 8개 종교유사단체의 신자를 모두 합하면 총 83만 7173명이 된다. 그러나 공인종교와 종교유사단체의 신자 수를 합하더라도 1920년 말 종교 인구는 총인구의 약 4.9%에 불과했다. 물론 그밖에도 천도교와 시천교의 일파인 제세교(濟世敎)나 제우교(濟愚敎)뿐만 아니라 여러 군소 종교유사단체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1920년 말에 종교 인구는 약 5~6%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무속이나 미신 같은 기타 범주를 고려해야 한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68호 / 2025년 3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