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극락 중생의 식사
음식 생각하면 보배 발우 나타나 눈으로 향으로도 이미 포만 집착과 탐착심 생길 수 없어 저절로 음식 준비되는 것은 중생 모두 포용하려는 원력
“타방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바로 끼니 때에 극락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산책한다.”
이른 아침 극락 중생은 밥 먹기 전, 다른 불국토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우리는 먼 길 가기 전에 배고플까 봐 든든하게 먹고 출발하는데, 극락 중생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그랬듯 최고의 공덕을 짓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경전에는 없지만, 다른 불국토로 가기 전 본국의 아미타불께 먼저 공양할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아미타불의 위신력 속에 살기에 늘 경배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 따로 형식을 갖추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정정취의 일은 범부가 알 수 없으니 허망한 생각을 해봅니다.
타방 부처님께 공양하고 돌아와서 극락 중생들은 밥을 먹습니다. 범본에는 휴식을 하고, ‘칭찬경’에는 하늘을 노닐며 머무른다고 해서, 밥을 먹는 것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만 보입니다. 그렇다고 구마라집 스님이 경전에 어긋나는 번역을 한 것은 아닙니다. ‘무량수경’에 극락 대중이 밥을 먹는 방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극락에서는 밥을 먹으려 하면 갖가지 맛을 내는 음식으로 가득 찬 보배 발우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눈으로 음식의 형상을 보고, 향을 맡으면 포만감에 몸과 마음이 유연해집니다. 이때 맛에 집착하거나 탐착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경에서 왕생자의 모습과 누리는 생활 환경은 타화자재천과 같다고 했으니 음식을 직접 섭취하여 소화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형상이 있는 음식을 먹기 때문에 원효는 ‘아미타경소’에서 이를 외식(外食)이라고 했습니다. 또 세친은 ‘원생게’에서 “불법의 맛을 좋아하고 즐기니 / 선의 삼매를 밥으로 여긴다”라고 했는데, 이를 원효는 내식(內食)으로 분류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극락에서는 굳이 음식을 먹지 않아도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생명이 다하는 일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극락 중생의 수명은 한량이 없으니 어느 쪽을 먹는 방식으로 선택해도 ‘상구보리’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또 먹는 것을 좋아하거나 굶주린 중생을 극락에 오게 하려면 맛있는 먹거리가 많고, 먹고 싶을 때 힘쓰지 않아도 음식이 준비된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범부 중생 모두를 포용하려는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경에는 “밥을 먹고 경행(經行)한다”고 하는데, 경행은 산책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배가 부르니 살짝 움직이는 정도로 생각했기에 원효가 이 경행을 근거로 실제로 음식을 섭취한다고 생각하여 ‘외식’이라 한 것입니다. 잘 아시듯이 극락에서는 늘 음악, 바람, 향기 등을 통해 아미타불의 법문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역본에 명시된 대로 휴식을 하든, 하늘을 노닐든 법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42대원에서 “극락 보살은 해탈삼매(解脫三昧)에 머무르며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했기에, 세친이 “불법의 맛”을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극락에서는 무엇 하나 공덕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식사는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삼매에 들기도 어렵지만, 늘 염불하여 아미타불과 인연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또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이 미래에 부처 될 사람들에게 예배하고 경시하지 않은 것처럼, 인연 된 모든 중생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도록 정토 법문을 권진(勸進)하여 미래 부처에게도 공양을 올리는 것은 어떨까요?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70호 / 2025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