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화두 기능은 번뇌망상 퇴치…공안 기능은 선의 지혜 터득
화두와 공안의 기능은 다르다 - 상 국내에선 화두와 공안 동일시 했으나 중국 등에선 명확히 구별 무자화두는 집착·망상 끊고 깨달음 향하게 하는 강력한 실천법 공안은 화두처럼 한두 글자 참구하는 것 아닌 공안 전체 참구
한국 선수행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이번에는 화두와 공안의 기능이 다르다는 내용의 기고를 보내와 이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윤 대표는 ‘당송사원의 생활과 철학’을 저술해 불교평론 학술상을 수상했으며, ‘무자화두 10종병에 대한 고찰’ 등 논문이 있다. 편집자
화두와 공안은 기능적으로 서로 다르다. 기능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곧 공부(참구)하는 방법과 목적 또한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화두의 기능은 번뇌 망상을 퇴치, 극복하는 데 있으며, 공안의 기능은 선(禪)의 지혜, 반야 지혜를 터득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화두와 공안은 어떻게 다를까? 같은 개념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일까?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화두와 공안은 다른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화두와 공안을 동일한 개념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중국의 선학자들은 이를 명확히 구별하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구분하는 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필자 역시 10년 전부터 구별해 왔다. 무엇보다도, 공안과 화두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구분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주 선사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공안을 살펴보자.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僧云: 一切衆生, 皆有佛性, 狗子為什麼卻無? 州云: 為伊有業識在”(어떤 납자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무/없다’ 다시 그 납자가 물었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다는 것입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그 개에게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 선문답의 처음부터 끝까지, 즉 전체는 공안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조주 선사의 답어(答語)인 ‘무(無)’ 한 글자는 화두이다.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 또한 모두 선사의 답어가 화두로 정착된 사례이다.
공안에서 처음으로 답어를 뽑아 화두화(話頭化)한 인물은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이다. 이후, 이를 본격적으로 번뇌 망상을 퇴치하는 수행법으로 체계화한 인물은 12세기 초 남송시대의 선승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이다.
이제 ‘무(無)자’ 화두를 비롯한 화두의 기능을 살펴보자. 대혜선사는 ‘무자화두’의 기능과 용도에 대해 ‘서장(書狀)’ 부추밀(副樞密) 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此一字(無)者,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어떤 납자가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조주 선사는 ‘무(無)’라고 대답했는데, 이 ‘무(無)’라고 하는 한 글자는 바로 수많은 악지악각(惡知惡覺, 분별심 등)을 꺾어버리는 강력한 도구이다).
대혜선사는 이 글에서 ‘무자화두’라고 하는 것은, 그릇된 지식과 알음알이, 번뇌 망상과 분별심 등 잘못된 견해[惡知惡覺]를 제거하는 수행법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대혜선사는 진소경(陳小卿)에게 보낸 답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遮一字者, 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어떤 납자가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무’라고 했는데, 이 ‘무(無)’라고 하는 한 글자는 곧 생사의 의심을 깨부수는 칼이다).
이 글에서 대혜선사는 ‘무(無)’라는 칼로 생사에 대한 의심(生死疑心), 즉 생사에 대한 의혹과 집착을 비롯한 온갖 번뇌 망상을 단번에 끊어버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두 글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무자화두의 기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번뇌와 망상을 극복하는 기능, ②분별심과 알음알이(지식으로 아는 것)를 제거하는 기능, ③잘못된 사고와 견해(惡知惡覺)를 제거하는 기능, ④생사에 대한 의혹과 집착, 의심을 제거하게 하는 기능(破生死疑心).
이상에서 보면 무자화두는 수행자가 집착과 망상을 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강력한 실천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제 공안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자. 공안은 선(禪)의 지혜와 반야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공안은 화두처럼 한두 글자만 참구하는 것[單提]이 아니라, 공안 전체를 참구해야 한다[全提]. 단순히 ‘무(無)’ 한 글자만 붙잡고 수행하는 화두 참구 방법과는 다르다. 다시 말하면 공안의 전체적인 의미와 메시지를 파악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곧 공안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다만 공안은 선(禪)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빙빙 에둘러 표현하는 요로설선(繞路說禪) 방식이라는 점, 그리고 가장 주의할 점은 먼 곳(심오하게 생각)에서 찾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공안을 예로 들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僧云: 一切衆生 皆有佛性, 狗子為什麼卻無? 州云: 為伊有業識在.”(어떤 납자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무/없다’. 다시 그 납자가 물었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없다는 것입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그 개에게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공안에서 조주 선사가 강조하는 핵심 글자는 맨 마지막 문장, 즉 ‘為伊有業識在’이다. ‘무(無)’가 아니다. 이는 ‘그(伊) 개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에 깨달음(부처)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교리적, 논리적으로 100% 맞는 말이다.
‘업식(業識)’ 또는 ‘업식성(業識性)’이란 중생의 사량(思量), 분별심, 알음알이(知識, 지식으로 아는 것) 등 번뇌와 망상을 가리키며, 이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 만일 중생에게 탐욕과 어리석음, 무명(無明)이 없다면 번뇌도 발생할 까닭이 없다. 조주 선사는 개에게 반야 지혜가 없으며, 무명으로 인하여 업식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는 단순히 ‘개’라고 하는 동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개’라는 동물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불성을 갖고 있을까(實有佛性)?’라는 의문심, ‘개의 불성 유무(有無)’에 대하여 분별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이 공안의 기능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분별심과 고정관념(구자무불성)’을 깨뜨려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추가로 다른 공안을 하나 더 예로 들어보자. ‘벽암록’ 제6칙에 있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다.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 不問汝. 十五日巳後, 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문선사가 7월 15일 해제일에 법어를 했다. ‘보름(7월 15일 해제) 이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다만 보름(해제) 이후에 대해 한마디로 답을 해 보라’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스스로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
이 법어의 전체, 즉 처음부터 끝까지는 공안(公案)이고, 그중에서 운문선사의 답어인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화두이다. 이 공안을 화두로 참구하려 한다면, ‘일일시호일’ 다섯 자만 붙잡고 참구하면 된다. 오직 마음속으로 이 다섯 글자만 반복해서 사유하면 된다. 이는 진언이나 다라니를 염송하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안으로 참구(공부)하고자 한다면, 그 의미와 메시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즉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통찰해야 한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안, 초조, 근심, 걱정’ 등 번뇌가 없는 날이다. 심오한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좀 넌센스다. 무자 화두도 마찬가지로 ‘무’ 한 글자만 참구하면 된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자면, 먼저 ‘매 순간이 좋은 순간’이어야 한다. 어떻게 매 순간을 근심과 걱정이 없는 ‘좋은 순간’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이 이 공안의 과제, 숙제이다. 수행자는 이 공안을 통해서 ‘날마다 좋은 날’을 이루는 방법을 깨닫게 되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 ‘선(禪)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조석으로 ‘반야심경’을 외우는 목적 또한 반야의 지혜, 즉 공(空)의 지혜를 터득하여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데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은 의존적인 사고로는 실현될 수 없다. 자주적, 능동적이어야 한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선(禪)의 세계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일일시호일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뜻하는 공안이다. 여기서 하나의 지혜를 얻는다.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현실 긍정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공안이기도 하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 changhwa9@hanmail.net
[1772호 / 2025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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