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대종교 포교 사건과 종교 개념의 혼란

대종교 포교 사건, ‘종교’ 개념을 묻다 일본, 종교 통제와 개념 모호 신종교들 유사단체로 분류돼 명화학교 대종교 포교 논란 총독부 혼선, ‘종교냐 정치냐’

2025-04-18     이창익

일본에서는 1899년 7월 27일 내무성령 제41호로 동년 8월 4일부터 ‘신불도 이외의 종교 선포’가 비로소 가능해졌다. ‘신불도 이외의 종교’란 주로 기독교를 의식한 표현이지만 오해의 소지는 다분했다. 1906년 2월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그해 11월 17일에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여 12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 규칙은 일본의 신도, 불교, 기타 종교 등에 속한 교종파가 종교를 선포할 때 통감의 인가를 받게 했다. 그러나 ‘신불도 이외의 종교’라는 표현이 ‘기타 종교’로 바뀌었을 뿐, 종교 범주의 모호성은 여전했다.

따라서 1915년 8월 16일에 공포된 ‘포교규칙’으로 ‘종교유사단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전까지 조선의 많은 신종교는 자기가 당연히 근대적인 ‘종교’ 범주 안에 속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1911년에 발생한 ‘대종교(大倧敎) 포교 사건’은 한일병합 후에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신종교를 지칭할 적합한 용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1911년 1월 17일에 성홍석과 손형순이 공주의 사립 명화학교(明化學敎) 학감 임헌일에게 대종교 신도가 되라고 권유했다. 그들은 교감 김석희와 생도에게도 ‘단군교 포명서(佈明書)’와 ‘단군교 5대 종지 포명서’라는 책을 나눠주었다. 또한 임헌일과 공립 공주보통학교 학무위원 김재면을 단군교 포교소 설립 대표자로 하여 포교소를 김석희 집에 설치했다.

그들은 대종교는 “조상의 교”이자 “국왕의 교”이므로 이것을 믿으면 국가 재흥을 기대할 수 있고, 또 대종교는 총독의 찬동을 얻은 바 있다고 선전했다. ‘단군교 5대 종지 포명서’에는 “일국의 성쇠흥망은 모두 본교 숭배의 후박(厚薄)과 유무 때문이며, 한 시대의 위인은 모두 교문(敎門)의 철인이나 그 자손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을 적발한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朴重陽)은 “경봉조신(敬奉祖神), 감통영성(感通靈誠), 애합족우(愛合族友), 안고기토(安固基土), 근무산업(勤務産業)”이라는 5대 종지를 문제 삼았다. 그는 ‘애합족우’는 형제자매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의 수족처럼 생사고락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민족 단결을 고취하고 있고, ‘안고기토’는 대황조(大皇祖) 단군이 남긴 국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미 망한 국가의 회복을 선동한다고 보았다.

당시 성홍석은 “사람이라면 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 자는 사람도 아니다. 본교는 조선교(祖先敎)로서 신도는 장수와 행복을 얻는다”라고 말했을 뿐이라고 발뺌하면서, 이미 경찰에게 포교 허가를 받았고, 대종교는 정치와 하등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이 대종교는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종교’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911년 2월 7일에 박중양은 내무부장관 우사미 가쓰오에게 대종교를 학교 생도에게 권유하는 자가 있는데, 단군교와 대종교를 종교로 공인한 일이 있었는지 문의했다. 이에 내무부는 단군교가 대종교와 단군교의 2파로 분열되었고, 단군교와 대종교는 “종래 한국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종교로 인정한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도 그것을 종교로 삼아 감시하거나 보호한 형적이 없으므로” 종교로 공인한 적은 없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앞으로 종교라는 ‘관칭(冠稱)’을 사용하는 단체를 종교로 인정하여 기성 공인종교, 즉 신도, 불교, 기독교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지는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회답할 뿐이었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74호 / 2025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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