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쁘다’는 ‘말’조차 없는 극락
극락엔 나쁨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 악인도 아미타불 염송하면 극락왕생 가능한 것이 불교 악도도 천상도 모두 끊어내 오직 깨달음으로 향하게 해
“그 국토에는 오히려 삼악도라는 이름도 없는데, 어찌 축생의 실체가 있겠느냐? 이 모든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께서 법음이 어디에나 퍼지고 흐르길 바라셔서 변화로 만드신 것이다.”
세친은 ‘원생게’에서 “대승의 선근으로 이루어진 극락세계는 평등하여 나무라거나 싫어한다는 이름조차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무량수경’의 열여섯 번째 서원으로 “극락 중생이 ‘불선(不善)’이라는 이름을 듣기라도 한다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다”고 한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 말은 극락에는 ‘나쁘다’라는 실체가 없기에, 그를 가리키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는 ‘눈’을 지칭하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무량수경’에는 왕생자를 구분하면서 하배(下輩)는 세상을 마칠 때, ‘나무아미타불’ 한 번만 해도 극락에 왕생한다고 합니다. 이는 가장 하근기의 사람이라도 극락에 바로 왕생할 수 있게 하는 대승불교가 중생에게 베푸는 최고의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어떤 이는 악업(惡業)을 가진 사람도 극락에 왕생한다면 불교의 인과법(因果法)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중생의 마음입니다. 비록 중생이지만 부처의 마음을 가정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이라면 잘잘못을 따져 벌을 받게 하고 싶어 하실까요, 아니면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하여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도록 이끌어주실까요? 불자라면 삼계의 도사(導師)이신 부처님께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극락왕생은 중생의 마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아미타불의 지혜와 자비 방편입니다.
‘무량수경’의 “극락에 왕생하면 단박에 오악취(五惡趣)를 끊어내니 악도가 저절로 닫힌다”라는 내용을 보면 극락에서는 악업(惡業) 자체가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단박에 끊어낸다’라고 한 부분은 ‘횡절(橫截)’을 해석한 것입니다. ‘횡’은 ‘가로’라는 뜻인데, 도랑을 폴짝 뛰어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삼악도가 있는 세상에서 삼악도가 없는 아미타불의 세상으로 바로 넘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중생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일정한 절차를 밟아서 악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극락에 왕생하는 순간 악에 물든 업이 색을 잃어버림을 의미합니다. 법장비구는 48대원을 세우고, 게송을 읊으면서도 극락에는 악도가 없을 것이라 다음과 같이 서원합니다. “모든 악도를 닫아 막아서 / 좋은 세상으로 가는 문을 훤히 열리라”라고 노래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극락에는 ‘악도’ 자체가 없기에 실체로서의 축생은 물론, 그 지칭하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극락에는 ‘혐오한다’던가 ‘싫어한다’는 감정을 느낄 원인조차 없다는 것이어서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즐거움을 향유하기만 하면 천상에 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앞서 오악취를 끊어낸다는 것은 천상 또한 끊어내야 한다는 말로 극락은 조금의 나쁨도 수용하지 않고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극락과 같은 환경을 제공하는 이유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법음을 끊임없이 들려줘서 수행하게 합니다. 극락에 왕생하면 바로 정정취가 되는데, 그 지위에 머물게만 하지 않고 더 수승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법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새소리를 이용하는 것일 뿐 축생에서의 새는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에서는 ‘새’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79호 / 2025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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