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땐진양될·45) 티베트불교 관상수행  - 중

‘라마최빠’ 기도로 몸·마음 편해지며 주변 인연도 밝아져 아들과 함께 존자님 친견하고 보드가야 순례로 신심 다져

2025-06-09     법보

운이 좋게도 ‘람림’ 수업이 개강하던 시기에 ‘라마최빠’(스승께 공양을 올리는 심오한 도의 의궤) 기도와 밀교 수업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접한 ‘라마최빠’ 기도는 무상요가에 해당하는 수행이었다. 티베트어로 따라 하는 기도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고, 스님께서 하시는 수인(手印)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스님의 가르침과 기도집에 적힌 대로 따라 했지만, 관상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내 정수리 위에 모든 스승님을 모시고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지할 수 있는 의지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내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기도를 시작하며 깨닫게 되었다.

‘라마최빠’ 기도를 시작하며 몸과 마음 모두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몸이 허약하고 신경이 예민해 늘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면증도 심했다. 수면 부족 탓에 일상에서도 늘 지쳐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기도를 시작한 후 자연스럽게 나도, 내 주변도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얼굴이 밝아졌다”고 말했고, 심지어 “얼굴이 바뀐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 모든 변화가 공부와 기도의 힘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한국에서도 공부할 때 눈 밝은 스승이 꼭 필요하다고 하는데, 티베트에서는 그 의미가 한층 더 깊고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삼학사 주지 남카 스님은 활발한 번역 활동을 하신다. 특히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물질세계’를 번역한 공덕으로 2022년 6월 존자님을 친견하는 기회를 얻으셨다. 이 소식을 들은 순간,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고 문득 가장 친한 도반인 아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존자님을 뵈러 인도에 가려고 하는데, 너도 갈 수 있을까?”라는 말에 아들은 “와, 당연히 가야지. 엄마가 얘기하면 스님이 허락하실 거야”라며 웃었다. 실제로 남카 스님께서도 흔쾌히 아들과의 동행을 허락하셨다.

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아들이 손목을 다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간절히 기도드렸고, 다행히 출발 전까지 치료를 잘 마쳐 반깁스를 한 채 다람살라로 함께 갈 수 있었다.

인도에 도착하자 남카 스님께서 아들의 팔에 “호~” 하고 따뜻하게 입김을 불어주셨다. 예전 할머니들이 아픈 곳에 입김을 불어주시던 모습 같아 감동적이었다. 아들은 존자님께 까닥(흰색 스카프)과 연등을 공양했고, 그날은 우리 모자에게 인생 최고의 날로 남았다. 지금도 아들은 그때의 친견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가피 덕분인지 사춘기 또한 큰 어려움 없이 잘 넘기고 있다.

이듬해인 2023년 12월 말, 대기원 법회에 참석하고자 인도 보드가야를 찾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마하보디 대탑과 그 안의 부처님을 실제로 보자 감격으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어느 날 새벽, 형님 도반과 함께 참배하러 갔을 때 마침 스님들이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출입이 통제되어 대탑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모두 조용히 바닥에 앉아 스님들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보드가야를 모태에 비유하신 환희정사 상조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순간의 평온함은 스님의 비유와 꼭 들어맞았다. 나는 조용히 ‘라마최빠’ 기도를 올렸다. 옆자리에서는 희끗한 머리를 길게 땋고, 세련된 차림을 한 노보살님이 한글로 번역된 ‘라마최빠’를 유심히 읽고 계셨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옅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셨고, 그 따뜻한 눈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수많은 티베트 스님들과 함께했던 대기원 법회의 순간들도 여전히 선명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1780호 / 2025년 6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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