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초기 개신교 선교사와 조선인 하인들

하인으로 시작된 조선의 개신교 신앙 치외법권 등 특권으로 등장 세속적 힘이 신앙으로 포장 미국 생활양식은 전도 수단 하인을 일차 전도 대상 삼아

2025-06-16     이창익

흔히 종교는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나 진리가 사람들을 매혹하여 신도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 전파에서는 비종교적인 동기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00년을 전후하여 개신교 외국인 선교사는 조선 정부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치외법권의 힘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인 평민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 즉 양대인(洋大人)이라 불리곤 했다. 양대인은 치외법권 등의 특권을 누리는 권세 있는 외국인 선교사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따라서 초기의 많은 개신교 신자가 외국인 선교사가 가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힘’에 이끌려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가 사는 주택이나 조계지는 미국의 물질적인 풍요를 소개하고 쾌적한 가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문명의 전시장’ 같은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식료품, 카페트, 가구 등의 생활필수품을 모두 미국에서 수입해 사용했다. 따라서 선교사의 삶은 ‘기독교 문명’과 ‘미국식 생활양식’을 동일시하는 효과를 낳았고, 개종하면 물질적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 개신교의 효과적인 전도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는 데 기여했다.

조선에 온 젊은 미국인 선교사들은 온갖 육체적 고난을 이겨내고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조선에 왔다. 그들은 조선에서 하인들에게 모든 육체노동을 전가한 채 안락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선교사의 물질적 풍요가 기독교 선교의 좋은 방편이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

게다가 젊은 외국인 선교사는 웨이터, 문지기, 유모, 요리사, 가마꾼 등을 하인으로 고용하여 본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귀족 생활을 영위했다. 선교사는 하인에게 조선어로 늘 ‘반말’을 사용했다. 하인은 선교사를 ‘대인’ 또는 ‘대감님’이라 불렀고, 선교사 부인에게는 ‘대부인(大夫人)’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남자 선교사는 처음에는 말, 나중에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이동했고, 선교사 부인은 가마를 타고 다녔다.

또한 초창기 선교사들은 하인을 일차적인 개종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최초의 조선인 북감리파 신자 가운데 한 명이자 1901년에 김기범(金基範)과 함께 조선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창식(金昌植)은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의 문지기로 고용되었다. 또한 북감리파의 초기 신도로서 목사가 되고 항일운동도 했던 전덕기(全德基)도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요리사였다. 1893년경에 북감리파 조선인 신도 62명 가운데 3분의 1이 선교사의 고용인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최초의 장로파 목사 가운데 한 명인 이기풍(李基豊)도 처음에는 북장로파 선교사인 윌리엄 스왈른의 요리사로 고용되었다가 조사(助事)가 되었고, 1907년에는 서경조(徐敬祚), 길선주(吉善宙) 등 6인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또한 제주도로 파견되어 전도한 조선 최초의 여성선교사 이선광(李善光)도 처음에는 스왈른 선교사의 유모로 고용되었다. 스왈른 선교사 부부는 하인을 훈련시켜 조사나 전도사로 만드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가 지닌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힘은 조선인에게 불교와 유교가 결코 보여준 적 없던 종교적 미래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치외법권과 물질적 풍요라는 선교사의 세속적인 힘이 기독교만의 ‘종교적인 힘’으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비종교적인 조건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81호 / 2025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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