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땐진양될·45) 티베트불교 관상수행 - 하
‘유식’ 가르침에 의문 풀리자 가슴 시원해지며 환희 느껴 수행 없는 교학은 그릇된 길 불교공부의 핵심은 ‘꾸준함’
2024년, 서울 삼학사에 4년제 날란다 코스가 개설됐다. 나는 ‘람림’과 불교철학, 그리고 인명학(뒤다)을 이수하고 시험까지 치른 뒤 올해 2학년이 되었다. 늘 회사 일과 집안일에 쫓기며 공부를 했기에, 수업 시간 외에 따로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수업에 참석하려는 의지를 다졌고, 모든 개인 일정을 수업에 맞춰 조정했다. 놓친 수업은 출퇴근 시간에 운전하며 녹음 파일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삼학사 주지 남카 스님의 수업 내용이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불교철학 수업 시간, ‘심오한 견해’가 중관 중 귀류논증학파의 공성 견해를 의미한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광대한 행위’가 어째서 유식학파로부터 전해졌는지는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유식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뢰야식뿐인데, 도대체 왜 ‘광대한 행위’와 연결된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유식삼십송’에 대한 한국스님의 법문도 들어보았지만,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이에 남카 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는 세 차례 법륜을 굴리셨다”며, 둘째 법륜(중관)에서는 반야경을 통해 제법의 궁극적 실상인 ‘무상(無常)’을 설하시되, 도(道)의 체계는 간접적으로만 말씀하셨고, 셋째 법륜(유식)에서는 그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무상을 보다 거칠게 설하시며, 도의 체계는 매우 상세히 설명하셨다고 한다.
그제야 ‘광대한 행위’의 법맥이 유식학파에서 비롯된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참 동안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 그날 부처님께서 삼전법륜을 굴리신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환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작은 구멍에서 졸졸 새던 맑은 물이 어느 순간 ‘툭’ 하고 터지며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은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환희였다. 다음 날 출근길에도 그 감흥이 가시지 않아, 차 안에서 기쁨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어떤 분은 “교학만 공부해서 수행이 되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교학을 바르게 공부하면 수행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교학만 배우고 수행하지 않는 것도 바른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윤회 속에서 고통받는 이유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 먹는다면 반드시 수행을 하게 된다. 내가 부처님 법을 배우고 공부하는 이유, 발심이 분명하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내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이끌어 주는 스승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백지였던 내가 어떻게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을까. 쉽게 배울 수도, 이해할 수도, 접할 수도 없는 이 공부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 병아리가 알을 깰 때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면 조금 더 쉽게 나올 수 있듯, 내가 가는 길에도 스승님과 도반들이 함께해 주셨기에 외롭지 않게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은 우리에게 남겨주신 소중한 보물이다. 그런데도 눈앞에 두고 바라보기만 하며 지나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일 것이다. 짧은 수행 경험 속에서 내가 가장 깊이 깨달은 점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꾸준히’ 놓지 않고 나아가는 자세가 공부와 수행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제가 하는 모든 공부와 수행으로 은혜로운 어머님이신 일체중생의 행복과 부처님의 불법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기원하고, 청정한 스승님의 색신이 이 우주에 오랫동안 머무시기를 발원하며 회향합니다. 성불하십시오.”
[1782호 / 2025년 6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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