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멸의 신화 넘어서는 평화의 상상력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6월 24일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다지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때마다 ‘구약성서’의 두려운 구절이 떠오른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신명기’ 6:4) 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명령, “그때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그들과 혼인을 맺으면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너희 아들이 나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야훼께서 진노를 발하여 순식간에 너희를 쓸어버리실 것이다. 그 대신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들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고 우상들을 불살라라.”(‘신명기’ 7:2~5)
이러한 ‘진멸의 명령’은 구약 곳곳에서 반복된다. “그 성읍에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말라.”(‘여호수아’ 10:40) “사울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사무엘상’ 15:8)
문제는 이 언어들이 단순한 고대의 유물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면에 깔린 ‘선택된 민족’과 ‘멸절되어야 할 자들’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지금도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한다. ‘야훼’라는 절대자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은, 종종 인간의 윤리적 판단을 정지시키며 무차별의 공포를 덧씌운다.
“진멸시키겠다”는 신의 명령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하느님인가, 아니면 신을 앞세운 인간의 욕망인가? 그리고 진멸이 과연 가능한가? 억눌리고 몰린 자들이 끝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면, 언젠가는 “이 풍진 세상을 다 태워버리자”며 불을 지르지 않겠는가? 한 사람, 한 민족이 백 번 짓밟히고 침묵을 강요당한다면, 결국 한 번은 되받아치게 되지 않겠는가?
그 불길은 결코 한쪽만을 태우지 않는다. 불똥은 곁에 있는 이웃에게 튀고, 급기야는 온 동네가, 온 세계가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상대편을 모두 몰살시키겠다고 나서는가? 이스라엘의 그러한 태도 이면에는 구약에 담긴 잔혹함과 함께, 자신들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히틀러 시대의 기억, 그로부터 역설적으로 배운 무서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영국의 전쟁사학자 존 키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렇게 썼다.
“체계적인 학살이 언제 어디서나 나치 권위 행사의 밑바탕을 이루었으므로 히틀러는 자기가 정복한 신민을 통치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집단수용소에 관해 알면, 영웅적으로 저항하는 사람 극소수를 빼고는 모든 사람이 공포의 다섯 해 동안 아주 비굴해졌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선택과 배제, 승리와 진멸의 논리에 빠진 세계 앞에 서 있다. 불길 속으로 서로를 몰아넣는 이 광기를 말리지 못한다면, 결국 그 불은 우리 자신을 태우고 말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짧은 게송 하나를 다시 새긴다. 이것은 경고이자 기도이다. “진멸은 세상을 없앨 수 없고/ 수모가 누적되면 불길이 타오른다./ 한 번 붙은 분노가 온 세상을 태우니/ 자비의 바람만이 고통을 덜어주리.”
‘법구경’에서 강조하듯, 증오에 의해 증오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제 진멸이 아니라 자비를 선택해야 할 때다. 그리고 그 자비는 힘의 균형이나 외교의 기술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비는 나약함이 아니라, 가장 강한 평화의 불꽃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783호 / 2025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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