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49) 조사선 수행 - 상
연극 수업 중 ‘자아’ 허구성에 큰 충격…‘참나’ 찾아 선공부 확실한 ‘무엇’ 찾으려 헤매다 깊은 좌절…극심한 불안 겪어
인생이 이미 연극인데 그 속에서 또 연극을 했다. 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시작해 20~30대 내내 연극을 하며, 주로 대본을 쓰거나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 30대 후반쯤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처음엔 서구 영성가의 책에서 시작해 기독교, 힌두교 서적을 조금씩 읽어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책에서 인용한 선사(禪師)들의 일화나 법문이 더 강하게 끌렸다. 그래서 찾아보니 유튜브에 막대한 양의 선(禪) 법문이 있었다. 선은 소수의 출가자에만 해당하는 비밀수행인 줄 알았는데, 그 개방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3~4년쯤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좀 과했는지 주변에서 “종교에 너무 빠지면 예술은 끝장”이라며 걱정했다.
단번에 끝장은 아니었지만 서서히 균열이 나타났다. 어느 날 극작과 수업 때였다. 무대 위에 빈 의자를 하나 놓고, 거기 앉아 있는 허구의 인물을 상상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그 인물의 인생 이야기를 떠올리며 즉흥적으로 캐릭터를 창조하는 수업이었는데, 그날따라 작업이 아주 잘 돼서 허구의 캐릭터가 정말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렇게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더했다.
“좋아. 그럼 이제 캐릭터는 놓아 두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지? 우리도 자기소개서에 인생 이야기를 쓰지 않나?”
내가 만든 이야기 너머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현실의 자아도 허구의 캐릭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면 인생도 그 자체로 연극이었다. 갑자기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자 학생들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나 역시 감당 못할 혼란을 느꼈다.
작가로서 대본 작업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 개인의 강력한 의지로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기존의 극작술에 더 큰 거부감을 느끼게 됐다.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것을 학생에게 가르치려니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수업은 점점 엉망이 돼 갔다.
단지 내가 만든 이야기에 내가 속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제는 연극이 아닌 삶의 진실을, 캐릭터가 아닌 참된 나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이 점점 선(禪)공부로 기울어갔다.
그러나 혼란과 불안은 선공부 자체에서 더 심각해졌다. 공부 중에는 이런저런 체험을 했다. 문득 마음이 시원해지기도 했고, 황홀감에 취해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생각이 쉴 때면 눈앞의 세상이 선명하게 살아났는데, 너무도 생생해 마치 신이 두두물물 속에 들어가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허공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느껴졌는데, 그럴 때마다 꼭 텅 빈 극장에서 살아 숨 쉬던 생생한 어둠과 침묵이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연극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꼭 뭔가를 박탈당한 것처럼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로는 오고 가는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더 확실하고 결정적인 ‘무엇’을 찾아 다시 헤매길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허깨비에 홀려 허송세월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면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오히려 선공부 외의 것들과 점점 멀어졌다. 대인관계나 세상일은 물론 그렇게 좋아하던 연극도 영 싱거운 짓처럼 느껴졌다. 홀로 과음하는 날도 잦아졌다. 언제부턴가 혼자 가만히 있으면 꼭 옆에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까지 들렸다. 병원에 갔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러다 정말 사람이 이상해질까 봐 두려웠다.
[1784호 / 2025년 7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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