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동학과 정감록의 변형: 부적으로 변형된 십승지
최제우의 ‘궁궁’과 민중의 구세 신앙 목검과 주문, 항서의 비책 ‘궁궁’ 부적은 재난의 방패 동학에 깃든 ‘정감록’ 유령 정도령 신앙, 총독에 투영
동학을 창교한 최제우(崔濟愚)는 “서양의 적이 나오면 돈, 곡식, 갑옷을 입은 병사는 쓸모가 없고 단지 주문과 검무(劍舞)로만 적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목(木)이 철(鐵)보다 날카로우므로 서양인의 눈을 현혹하고 보검(寶劒)으로 오인하게 하면, 비록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감히 나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제우는 1863년에 체포된 후 공초(供招)에서도 동학의 주문에 대해 “서양 사람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앞으로의 변고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하므로 13자 주문을 지어 사람에게 가르쳐 서양 사람을 제압하고자 했다”라고 진술했다. 또 검무에 대해서 “하루는 천신이 내려와 가르치기를 ‘요사이 바다에서 배로 왕래하는 자는 모두 서양인이며 칼춤이 아니고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면서 검가(劍歌) 한 편을 주셨다”라고 진술했다.
특히 최제우는 병자에게 약물로서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장자리에 두 개의 ‘궁(弓)’자를 쓴 부적을 그려 주고, 이것을 불살라 물에 타 마시거나 씹어 삼키게 했다. 이것이 바로 선약(仙藥)이라 불리는 궁궁(弓弓)이나 태극(太極) 형상의 영부(靈符)이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에 따르면 최제우는 상제에게 이 영부를 받았다. 당시에 최제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에는 이익이 송송(松松)에 있었고[利在松松],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임신년(壬申年)에는 이익이 가가(家家)에 있었으며[利在家家], 1864년 갑자년(甲子年)에는 이익이 궁궁(弓弓)에 있으므로[利在弓弓], ‘궁궁’이라 쓴 부적을 불살라 마셔 질병과 서양인에 대항하는 액막이로 삼고자 했다고 한다.
‘정감록’에서 궁궁은 ‘보신(保身)’과 구명의 땅으로 그려진다. 예컨대 ‘토정가장결’이나 ‘경주이선생가장결’에서 궁궁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장소인 삼척의 대소궁기(大小弓基)로 표현되고, ‘서계이선생가장결’에서는 혈하궁신(穴下弓身)으로 표현되며, ‘감결’에서는 양궁(兩弓), 십승지(十勝地), 양백(兩白)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최제우에게 ‘궁궁’은 재난을 피하기 위한 피장처(避藏處)가 아니라 부적이 된다. 최제우는 구명을 위한 특정한 장소를 지시하기보다 13자 주문, 목검과 칼춤, 그리고 영부를 불살라 물에 섞은 ‘궁을부수(弓乙符水)’를 통해 사람 자체를 ‘궁궁’으로 만드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천도교에서도 ‘정감록’의 유령은 이따금 출몰했다. 1928년 12월에 천도교 신파는 도령제(道領制)를 실시하여 최린은 도령, 정광조는 부도령이 되었다. 이때 이돈화는 ‘정감록’에 나오는 “오미락당당(午未樂當當)”, 즉 “오년과 미년에는 즐거운 일을 만난다”는 구절을 언급했다. 1930년과 1931년이 경오년(庚午年)과 신미년(辛未年)이었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령(道領)을 도령(道令)으로 해석하면서, 정광조의 성이 정씨이므로 정도령(鄭道令)에 의해 곧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천도교 구파는 ‘정도령’이라는 말로 교도를 ‘정감록’의 미신적인 소굴로 이끌고 있다고 신파를 비판하면서 그럴 거면 차라리 계룡산으로 가라고 조롱했다.
아예 조선 총독을 정도령으로 간주하며 ‘정감록’을 실현된 예언으로 간주한 해석도 있었다. 1935년 5월 15일자 ‘경성일보’는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 “농촌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고, 심지어는 우가키가 바로 ‘정감록’에 나오는 구세주 정도령이라는 유언이 유포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85호 / 2025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