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사지 안내판 15년 만에 교체 “역사왜곡에 원칙적 대응 결실…종교화합 디딤돌로”
전국비구니회, 7월 11일 여주 주어사지서 기념행사 불교사 빠진 채 천주교 중심이던 기존 안내판 내용 자료조사·공문제출·면담 등 지속적 대응 끝에 교체 주어사지 공공성지화·의징대사비 봉환 향후과제로
조계종 전국비구니회(회장 광용 스님)가 15년 만에 여주 주어사지 종합안내판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바로 세웠다. 불교사적 가치를 배제한 채 천주교 중심으로 서술됐던 기존 안내판을 바로잡은 이번 수정 작업은 전국비구니회의 오랜 노력으로 이뤄냈다. 전국비구니회는 이를 계기로 주어사지를 불교와 천주교가 함께하는 화합의 성지로 복원하고, 현재 절두산에 있는 의징대사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까지 나아갈 뜻을 밝혔다.
전국비구니회는 7월 11일 여주 주어사지에서 ‘주어사지 종합안내판 수정 재설치 기념-주어사지 역사를 다시 세우다’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에 교체된 주어사지 종합안내판은 15년 만에 새롭게 설치된 것으로, 기존 안내판에서 불교사적 가치를 배제하고 천주교 중심으로 서술했던 편향을 바로잡았다. 특히 ‘천주교 강학’ 문구는 당시 ‘서학’으로 전래됐던 사실을 반영해 ‘천주학’으로 수정됐으며, ‘한국 천주교 발상의 요람지’라는 문구는 ‘한국 천주교와 불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로 변경됐다. 또 불교문화유산연구소(소장 호암 스님)가 2022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본존불을 봉안한 법당과 요사채 2동의 흔적, ‘조와화주신(造瓦化主信)’ 명문 기와, 범자가 새겨진 암막새 등 유물 정보도 안내판에 추가됐다.
이번 종합안내판 교체는 전국비구니회가 오랜 기간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이끌어낸 성과다. 전국비구니회는 2024년 4월, 기존 안내판이 주어사지의 불교사적 가치를 배제한 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수정 추진에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중심으로 ‘종합안내판 수정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수차례 회의를 열고 각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수정안을 정리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는 15쪽 분량의 공문을 여주시청 문화예술과에 공식 발송해 수정을 요청했다.
8월 13일에는 직접 시청을 방문해 담당자와 면담을 진행하고 핵심 쟁점을 설명하며 조율을 이어갔고, 9월 26일 여주시(시장 이충후)는 이장호 여주시사 편찬위원, 조성문 여주문화원 여주학 연구소장, 정석대 여주문화원 연구위원 등 전문가가 참여한 자문회의를 열며 수정안을 면밀히 검토했다. 이후 12월 5일 최종 수정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으나, 행정 절차 지연으로 인해 설치는 당초 예정됐던 2025년 1월에서 3월, 다시 5월로 순연됐다. 전국비구니회는 이에 유감을 표하며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번 교체 사업의 실무를 맡은 전국비구니회 기획실장 금해 스님은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번 교체가 향후 5년, 10년 뒤 더 정확하고 충실한 안내판으로 개정될 수 있는 기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안내판 제작과 설치를 담당한 박내태 여주시청 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장은 “앞으로 주어사지가 많은 시민이 찾는 명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국비구니회장 광용 스님은 인사말에서 “정말 감개무량하다.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함께해준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를 비롯해 한국교수불자연합회, 관계자, 교계 언론 등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이번 종합안내판 재설치는 단순히 글 몇 줄을 고친 것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했던 당시 스님들의 자비를 계승하고 종교 간 이해와 화합, 진실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불교와 천주교 양측의 역사를 함께 담아낸 안내판이 15년 만에 다시 세워진 것은 역사와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공동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며 “이번 교체가 주어사지의 온전한 가치를 되살리고, 이곳이 역사와 문화, 통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조계종 사회부장 진경 스님은 축사에서 “불교계가 그간 종교 편향 문제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광화문 시복터, 해미읍성, 홍주읍성 등 천주교 중심의 성지화가 진행되는 현실을 보며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며 “종교가 선조를 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치인이 자신의 종교를 선양하거나 국민의 혈세로 종교 편향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어 진경 스님은 “이를 바로잡을 힘을 불교계가 키워야 한다. 천주교나 다른 종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간 소홀히 한 점을 돌아봐야 한다”며 “이번 종합안내판 교체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국비구니회 수석부회장 수경 스님은 “과거 주어사지에 있었던 의징대사비가 현재 서울 절두산 천주교 성지에 모셔져 있다”며 “비석을 제자리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주어사지 복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전국비구니회의 향후 주어사지 역사 바로잡기 사업 방향성을 언급했다.
수경 스님은 “주어사지는 불교와 천주교의 역사를 함께 품은 장소로, 공공성지로 복원해야 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며 “4년 전의 원력과 열정을 다시 모아야 할 때다. 주어사지를 바로 세우는 일은 세계 최초의 종교화합 성지를 만들어가는 길이며, 다음 행사는 그 복원을 축하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어사지 문제가 불거지기 전부터 주어사지 보호에 힘썼던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장이자 수원 아리담문화원장 송탁 스님은 “2015년 처음 주어사지를 찾았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매주 천주교 미사가 열렸고, 신부님으로부터 주어사지에 남아 있던 낡은 연등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서글펐던 기억이 있다”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마치 빼앗긴 내 집 같았지만, 오늘은 마침내 온전히 되찾았다는 생각에 행복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상훈 한국교수불자회장도 “주어사지는 용서와 자비를 바탕으로, 당시 주어사 스님들의 상생과 자비 정신을 기리는 종교평화의 상징 공간으로 조성돼야 한다”며 “복원 작업과 함께 한국 종교평화를 기념하는 뜻깊은 장소로 만들어, 화합과 상생이라는 종교의 참된 가치를 길이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주어사지 종합안내판 교체 과정에서 학술적으로 큰 기여를 한 민순의 연구위원과 이병두 원장의 강의가 이어졌다.
민 연구위원은 ‘조선 사회 속 불교의 흐름’ 강의에서 “조선시대에는 절에서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사대부들에게 절에서 독서하도록 허락한 ‘사가독서’ 제도에서 유래”라며 “주어사지 역시 이 전통 속에서 선비들이 유학을 공부하던 공간이었다. 문헌을 보면 이벽이 하루 밤 서학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들이 천주교 강학만을 목적으로 주어사에 머물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주어사지 스님들의 용기와 자비 실천’ 강의에서 “과거 주어사 스님들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강학 공간을 내어준 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깊은 자비심의 실천”이라며 “천주교 측에서도 주어사와 천진암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감과, 스님들의 자비와 희생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 진경 스님, 전국비구니회장 광용 스님을 비롯해 운영위원장 진명, 수석부회장 수경, 비구니연구소장 심원, 기획실장 금해,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장 송탁, 성림사 주지 현담 스님 등 스님들과 이상훈 한국교수불자연합회장, 이길수 대한불교청년회장,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박내태 여주시 문화예술과 문화유산팀장 등 사부대중 7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주어사지의 천주교 성역화 논란은 2021년 8월 천주교 수원교구가 광주시와 ‘천진암성지 광주순례길’ 조성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해당 협약은 주어사지 일대를 천주교 성지로 포함해 순례길로 개발하는 계획을 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불교계에서는 주어사지의 역사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왜곡·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한 조사 결과, 천주교 측이 이미 1970년대부터 주어사지 주변 토지를 점진적으로 매입해 왔고, 인근 산림도 장기간에 걸쳐 관리해왔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정황은 불교사찰터인 주어사지가 점차 천주교 중심의 종교 공간으로 전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한 사례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전국비구니회는 당시 12대 회장이던 본각 스님의 주도 아래 ‘불교유적 가톨릭성지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불교역사제자리찾기운동본부’를 발족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어 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해 대한불교청년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한국교수불자연합회 등 불교계 주요 단체들이 뜻을 함께했으며, 법보신문 등 교계 언론도 이에 주목했다.
이후 수차례의 세미나와 토론회, 자료집 발간, 불교문화유산연구소의 현장조사 등을 통해 주어사지의 역사적 의미가 조명됐다. 특히 2022년 발굴조사에서는 법당과 요사채 유구, ‘명문 기와’와 ‘범자 암막새’ 등 유물이 확인되면서 주어사지의 불교사적 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이번 주어사지 종합안내판 교체는 단순한 문구 수정에 그치지 않고, 종교적 정체성과 문화유산의 진실을 회복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는 불교계가 타종교의 일방적 종교편향에 대해 원칙 있는 대응을 펼치며,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칙을 수호한 의미 있는 사례로 남게 됐다.
여주=박건태 기자 sky@beopbo.com
[1786호 / 2025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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