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49) 조사선 수행 - 하

효담 스님 법문에 강한 확신 법문 들으며 좌선·요가 병행 무대·분장실 오가는 과정서 ‘지금 이 마음’에 익숙해져

2025-07-18     법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살길이 열렸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연극 작업과 수업이 어려워졌고, 여러 사정이 겹치며 한동안 일을 쉬게 됐다. ‘오히려 잘됐다. 이 기회에 제대로 공부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우연히 해인사 소림선원장을 역임한 효담 스님의 법문 영상을 보게 되었다. 단박에 ‘이분이다’ 싶었다. 마침 서울의 가야산선원에서 스님이 법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법회에 참석해 처음으로 스님을 뵀다.

효담 스님은 밝고 힘찬 기운 속에, 깊은 산중의 난초 같은 고고한 멋을 지닌 분이셨다. 그 향기에 취해서였을까.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하는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스님의 당당한 실존 앞에서는 오히려 그런 말이 관념처럼 느껴졌고, 그저 곁에서 공부하며 스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가야산선원은 법문을 중심으로 좌선과 요가를 병행하는 공부 도량이다. 효담 스님은 법문하실 때 불교 교학이나 선사 어록뿐 아니라 서양철학과 현대과학에도 문을 열고 자재롭게 활용하셨다. 물론 처음부터 법문이 다 들리진 않았지만, 마음을 열고 자꾸 듣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중첩’에 대한 법문이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던 오랜 습관이 조금씩 깨졌다. 중도(中道)에 대한 감각이 생겼달까. 그러면서 공부에 대한 안목도 어느 정도 생기고, 오고 가는 체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도 얻었다.

좌선은 안정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도반들과 함께하는 좌선은 혼자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힘과 깊이를 느끼게 했다. 오래 수행해온 도반들은 속이 단단하고 깊다. 그 곁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젖어든다. 정말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드는 선원이다.
글을 쓰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과거 이야기를 들먹였지만, 과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지금 이 마음. 산청 황매사에는 효담 스님이 머무시는 금심당이 있다. 금심(今心). 참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금심당이 어찌 황매사에만 있겠는가. 온 우주가 금심당 아닌가.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을 청소한 다음 조용히 혼자 앉는다. 그러면 꼭 분장실에 있는 배우가 된 것 같다. 스님의 양자역학 법문을 빌리자면, 배우와 극 중 캐릭터는 중첩돼 있다. 무대에 서는 순간, 즉 관찰자가 생기는 순간 배우는 곧 캐릭터가 되고, 무대에서 내려와 분장실로 돌아가면 다시 본래의 배우가 된다. 분장실은 연극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동시에, 연극이라는 시공간에서 한걸음 물러선 자리, 연극이 펼쳐지기 이전의 자리다.

요즘 내 공부는 생활 속에서 틈날 때마다 이 ‘분장실’에 자주 머무는 것이다. 잠시 역할을 내려놓은 배우처럼, 나도 그냥 자신으로 돌아와 조용히 쉬기도 하고,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이자 동시에 순수한 생명인 존재를 깊이 사유하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보면, 연극을 그만두고 진실을 깨달아보겠다며 헤매고 다녔던 여정조차 결국 하나의 연극이었다. 우주 전체가 살아 있는 극장이다. 극장 이름은 금심당!

언젠가 황매사 금심당에 앉아 비를 구경하던 때가 떠오른다. 창밖 빗소리도 좋고 차맛도 좋고 스님 말씀도 도반들 웃음소리도 다 좋다. 그런 우리를 창밖에서 구경하던 견공 하양이의 순한 얼굴과 그 눈동자도 참 좋다. 어디선가 스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야, 이 정도면 시가 한 편 떠올라야 하는데!”

효담 스님과 가야산선원 도반들께 그리고 금심당에 삼배를 올린다.

[1786호 / 2025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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