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성문 아라한과 보살
정토 가르침에는 심판의 개념 없어 극락은 대소승 차별 없으며 중생들 생각하는 우열 초월 나쁜 사람 극락 못간다 생각 극락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성문(聲聞)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가 아라한(阿羅漢)입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보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량수경’ 제14원에 따르면, 극락에는 성문 제자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단순히 많다는 데 그치지 않고,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모두 연각(緣覺)이 되어 백천 겁 동안 헤아려도 알 수 없다”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연각이라면 천안통(天眼通)을 이루었을 텐데, 그 신통력으로도 그 수를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언급한 ‘아미타경’의 경구에서도 보살들 또한 그와 같다고 했지만, ‘무량수경’에서는 보살에 대해 따로 서원을 세우지 않고 성문에 대해서만 서원을 세운 점이 특이합니다. 이는 정토불교가 대승불교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극락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이승(二乘)은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4원과 ‘아미타경’의 내용을 통해 극락은 대승과 소승을 가리지 않고 모든 중생을 위한 불국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대자비가 근본인 불교에서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했던 세친(Vasubandhu)이 그의 형 무착(無着, Asaṅga)의 영향으로 대승으로 전향했으며, 그로 인해 그가 원래 속했던 학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두 세력 간에 어느 정도의 갈등과 긴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승에 기반한 정토불교의 입장에서는, 극락이 대승 보살만을 위한 세계가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친은 ‘정토론’에서 “이승종불생(二乘種不生)”이라 하여 성문과 연각을 극락 대중에서 제외하는 듯한 견해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경전과는 다른 의견처럼 보이지만, 세친은 이 내용을 ‘대의문(大義門) 공덕 성취’에 포함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정토론’에서는 “대승의 선근으로 이루어진 극락은 평등하여 꺼리거나 싫어하는 마음조차 없으므로, 극락에서는 이승(二乘)의 신체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대승을 강조하는 말일 뿐 아니라, ‘정토론’을 저술하던 당시 세친의 입장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량수경’이 대승 경전임을 강조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대승으로 전향한 세친 입장에서, 극락에 왕생하여 다시 이승의 신체로 태어나야 한다면 극락이 그리 이상적인 세계로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극락은 대승과 이승 간의 차별이 없는 세계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생각하는 우열(優劣)을 초월한 곳입니다. 이러한 정토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이는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인 신란(親鸞)일 것입니다. 그의 제자가 쓴 ‘탄이초’에는 “선인(善人)도 왕생하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이겠는가?”라는 신란의 말이 전해집니다.
일반적으로는 착한 사람이 극락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미타불은 선악의 업(業)을 가리는 분이 아닙니다. 착하든 나쁘든 중생을 제도할 생각만 하십니다. 그래서 정토 사상에는 ‘심판’이 없습니다. 나쁜 사람은 극락에 왕생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직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극락에는 성문이 많다”는 말은, 극락이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않는 평등한 세계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87호 / 2025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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