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일련종에 의한 승려 입성 해금의 전말
조선 포교와 정치적 교섭 교차점 교토 묘각사의 조선 진출 청일전쟁과 정치개입 강화 사노 등 주도로 입성 해금 대법회와 불교계 장악 완료
진종대곡파에 뒤이어 조선 포교를 개시한 것은 일련종(日蓮宗)이었다. 1879년에 아비루 젠쿠로(阿比留善九郞)가 부산 용미산 정상에 당(堂)을 지어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상을 안치했다. 그 후 1881년 8월에 와타나베 이치운(渡邊一運)이 부산 서정(西町)에서 집을 빌려 사용하다가 공지를 매수해 설교소를 세웠지만 1885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련종의 조선 포교가 본격화된 것은 교토 묘각사의 아사히 니치묘(旭日苗)가 가토 분쿄(加藤文敎)와 함께 1891년 9월 초에 부산에 상륙한 후 동년 11월 25일에 부산 설교소를 묘각사 별원으로 말사화하면서 시작되었다. 아사히 니치묘는 미노부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를 총본산으로 하는 일련종의 일극주의 총본산 체제에 반발하여 조선 포교를 통해 묘각사의 말사를 획득하고자 했다. 당시 부산별원 주임을 맡은 가토 분쿄는 기독교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 승려에게 일본식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 사찰을 활용하여 조선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아사히 니치묘는 묘각사 차원에서 해외선교회를 조직한 후 1893년 7월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10월에 흥선대원군과 면담하여 포교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련종 당국은 전쟁 지원을 위해 임시보국의회를 소집하고 8월 30일에는 모리모토 분조(守本文靜) 등 2명을 인천으로 파견했다. 1894년 7월 23일에 일본은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한 후 대원군을 권좌에 앉혔고, 7월 27일에는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김홍집은 이동인을 통해 진종대곡파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1894년 7월 31일에 군국기무처에서 승려 입성 해금이 심의되었고 8월에 재의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결정되지는 못했다. 조선 불교 진흥을 통해 기독교를 방지해야 한다는 일본불교 주장을 받아들여 해금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후지시마 료온(藤島了穩)도 이노누에 가오루(井上馨) 전권대사와 일본공사관의 지원을 받고 대원군을 통해 승려의 입성 해금을 추진했으나 대원군의 간섭으로 실현되지 못한 듯하다.
1895년 3월 3일에는 일련종의 조선 국교화를 추진하고자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호리 니치온(堀日溫)과 시부야 분에이(涉谷文英)를 데리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노는 당시 궁내부 군대 고문관이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의 도움으로 승려 입성 해금을 추진했다. 오카모토는 1894년 3월에 김옥균이 암살되자 유해 수습을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기도 하고, 훗날 명성왕후 시해에 연루되었던 인물이다.
1895년 3월 12일에 경성에 온 사노 젠레이는 일본 공사관, 영사관, 고문관 등을 방문하고 17일에는 고종의 친형이자 궁내부 대신인 이재면(李載冕)을 만났다. 19일에는 ‘법화경’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같은 책과 향로 등의 헌상품을 가지고 왕궁에 들어갔다. 4월 21일과 22일에 사노는 승려 입성 해금을 청원하는 건백서를 들고 여러 대신을 방문했다. 마침내 김홍집과 김윤식 등의 도움으로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에 승려의 입성 해금이 결정되었고 곧바로 공포되었다. 동년 5월 5일에 사노 젠레이는 화계사, 용주사, 금강산과 남북한산 승대장(僧大將), 조선 승려 등 300여 명, 정부 고관과 일본인 명사, 일반인 등 1만 5000여 명이 참여한 대법회를 도성 안에서 보란 듯이 거행했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89호 / 2025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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