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교수행과 고행

중도, 고행을 넘어선 참다운 수행 부처님, 고행 대신 중도 선택 정진도 지혜 못 갖추면 위험 고행이 신심이 될 수는 없어 현대의 법도 신체 훼손 경계

2025-08-18     김백영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한 후 여러 스승을 탐방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업 사상에 따라 업을 소멸시키려면 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극단의 단식과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수행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모습을 조각한 청동조각상이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을 신과 동물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고, 중국에서도 천·지·인 3재사상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까닭에 뜻있는 인간은 신이나 하늘을 본받아 동물성을 초월하고자 하였다. 서양에서는 철학으로, 동양에서는 수행으로 그 통로를 삼았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란 의식을 바른 방향으로 전환하고 덕스러운 언행을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수행이란 기본적으로 8정도나 6바라밀을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유가에서도 대학8조목으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로 구분하면서 개인의 수신(修身)에서 출발하고 있다. 유가도 정좌(靜坐)를 수행방편으로 삼고 있다.

싯다르타는 몸을 고통 속에 가두는 고행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고행을 포기하였다. 우루벨라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고 수자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고 기력을 회복한 후에, 보리수나무 아래 길상초를 깔고 그 위에 좌정하신 후 고요히 사유에 들어가 35세 납월 8일에 샛별을 보고 홀연히 대각을 성취하였다. 열반 후 그곳에 보드가야 대탑이 세워졌다.

붓다는 후일 고행과 관련하여 비구 소나에 대한 법문에서 비나(vina, 현악기) 줄을 너무 팽팽하게 해서도 아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잘 균형되게 하면 조화로운 소리가 나듯이, 고행이나 방일이 아닌 균형을 유지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불법의 근본에서 멀어지면 고행이 마치 신심인 것처럼 포장되고 장좌불와 등 고행자를 존경하는 그릇된 풍조가 생긴다.
당나라 한유(768~824)는 ‘논불골표'에서 당시 머리카락을 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는 공양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고행을 비판하였고, 조선의 정도전도 ‘불씨잡변'에서 타락한 불교문화를 비판했다. 기독교도 중세에 로마 성요한 라테라노의 성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 피범벅의 상태로 성당에 들어가는 고행을 신심으로 칭송하였다. 이슬람은 지금도 라마단 기간을 설정하여 1달간 낮에 금식을 하도록 하고 있다. 원래 정신은 배고픔을 체험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금식으로 절약한 돈을 가난한 자를 돕도록 하려는 데서 출발하였으나, 오늘날 종교문화로 자리 잡고 저녁에 폭식함으로써 본래의 뜻이 망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속법에서도 수행과 유사한 배움의 장치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여 보호자가 자녀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취학시키지 아니하면 과태료 처벌을 받고(초·중등교육법), 국방의무인 병역을 기피하고자 신체를 손상시키면 처벌하고(병역법), 보험금을 탈 목적으로 자해하면 사기죄가 된다. 그러나 치열하게 정진하는 것은 고행이 아니다. 황벽선사가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아니하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고 한 것이 바로 치열한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대승행자는 올바른 안목을 가지고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값지게 보내는 것이 올곧은 수행이다. 이것이 수행의 요체이자 일상사의 비결이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잘못하면 세월만 낭비한다.

김백영 변호사 bykim8711@daum.net

[1789호 / 2025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