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승무, 불교 본질 지켜야 할 한국 춤

보유자의 부재, 형해화 우려 정신 사라지고 기술만 남아 승무 정신적 가치 복원해야 공연예술로 전락 방지 가능

2025-08-29     법보

승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춤이다. 홀춤(solo)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주인 대풍류는 11번의 장단 변화와 40여 분 러닝타임을 지닌다. 춤꾼이 법고까지 연주해야 하므로 고도의 기량이 필요하다. 장단의 변화, 춤과 연주의 결합, 긴 러닝타임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창작자는 알 수 없으나, 2021년 한영숙류 승무의 마지막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이애주 선생이 작고하면서 본질과 원형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거졌다.

현재 3~4세대 춤꾼들이 ‘전판’ ‘완판’이라는 명칭을 달고 승무를 추고 있지만, 보유자가 부재한 지금 정신적 본질은 외면한 채 형해화 현상이 심각하다. 다시 말해 승무가 지닌 내면적 본질은 소홀히 한 채, 기술적 형태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승무가 보여주기 위한 춤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승무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조선 중기 사찰에서 재인과 광대들에 의해 민간으로 전해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왜 ‘승무’라 불리게 되었고, 왜 전문 예인만이 전승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명칭 역시 스님들의 작법과는 구분되며, 조지훈의 시 ‘승무’가 대중 인식에 영향을 끼쳤지만 어디까지나 시적 상상일 뿐이다. 스님들은 계율 때문에 스스로 춤을 승무라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서 비롯되었지만, 민간에서 스님 복장을 흉내 낸 춤을 승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스님 복장을 하고 스님을 흉내 내는 춤은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탈춤계의 노장과장, 굿의 불사거리 등으로도 전해진다. 문헌과 현장에서도 승무의 형태는 다양하다. 장삼을 벗어 던져 속퇴를 의미하는 승무, 민화 속 줄타기 승무, 1930년대 사진에 남은 바라를 들고 추는 승무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승무는 단순히 스님 복장만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스님의 복장으로 북을 치되 불법승 삼보를 폄훼하지 않는 예술춤”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

무엇보다 승무는 불교적 사상이 내재된 춤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매방은 승무를 모든 춤의 기본이 되는 ‘법무’라 했고, 한영숙 역시 불교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는 재인과 광대들이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방류·재인류·무속류 등 전문 예인 집단에서 나타나는 개별 승무의 특징은 다를지라도, 그 근저에는 불교 사상과 세계관이 관통하며 승무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이루어야 한다.

이철진 구슬주머니 대표

그러나 오늘날 전승은 예술성과 순서만 강조되고 본질은 외면되고 있다. 승무를 예술춤으로만 이해하거나 다른 종교·학문적 틀로 해석하는 시도는 왜곡을 낳을 수 있다. 이는 레퀴엠을 불교 49재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왜곡이다. 승무는 경험자의 입장에서 삶에 대해 용맹정진하는 고귀한 자의 춤이다. 승무를 시작하는 춤꾼의 마음은 “이 한판의 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가득하다. 대서사를 마치고 땀범벅이 된 채 합장할 때의 심정은 “한 세상 잘 살았다, 이제 다음 생을 준비해야지”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승무는 민간에서 전승되었으나 불교에서 발생한 불교의 춤이다. 본질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공연예술로 전락할 것이다.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은 승무의 정신적 가치다. 지금이야말로 승무의 형해화를 극복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전통춤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1791호 / 2025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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