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유리잔

국립박물관 오픈런 등 불교유산 새롭게 각광 반가상 굿즈 열풍처럼 현재 가치로 살아나길

2025-08-29     성진 스님

며칠 전 한 신도분께서 “머그잔 필요하세요?” 하고 물어 오셨다. 그분의 성의를 거절하는 게 마음에 걸려, 감사히 잘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약속한 날 그분이 가져오신 유리잔을 보는 순간, 거절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에 들었다. 다름 아닌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의 상징인 ‘반가사유상’을 주제로 국립중앙박물관과 대형커피체인점이 협업하여 만든 특별한 유리컵이었다. 마치 유리로 된 세계의 고요한 안개 속 연못 위로 반가사유상이 머물고 계신 느낌과 같았다. 차를 마시기 위해 유리잔을 들면 그 아래에 사유의 부처님이 앉아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사유의 시간을 알아차리게 해주었다.

SNS와 기사에 올라온 국립중앙박물관 개장 전부터 1000여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명 ‘오픈런(open run)’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립중앙박물관 상품의 인기는 대단하다. 올해 초부터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서 뮤즈(MU:DS)라는 박물(museum)과 상품(goods)의 합성어로 만든 브랜드를 출시해 판매할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불교문화유산인 ‘반가사유상’을 소재로 한 상품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뜨거운 열풍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희소성의 가치를 일상의 예술로 누리고자 하는 인식의 변화라고 본다. 과거 문화유산 향유는 소수 계층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화유산은 그냥 박물관에서나 보는 것으로,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사임당의 ‘조충도’가 그려진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부모님의 생신에 조선시대 걸작인 백자 달항아리 모양의 케이크를 선물할 수도 있다. 박물관 유리관 너머의 유물이 내 손 안으로, 우리 집 식탁 위로 올라오면서 문화유산과 나와의 거리감이 줄어든 것이다.

처음 ‘사유의 방’이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서의 시간은 큰 충격과 감동이었다. 불교라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 마치 부처님과 함께 사유하고 있는 느낌은 법당에서의 경외심과는 또 다른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사자성어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있다. ‘옛 것을 익혀 새로움을 아는 것’으로 단순히 옛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현재적 가치를 발견하고 오늘의 삶에 적용하는 지혜이다. 

‘사유의 방’이 일으킨 반향은 단순히 세대나 대중의 관심을 쫓아가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공간의 상징성과 실존하는 문화유산을 ‘사유의 방’과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물며 무언(無言)의 이야기를 경험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학창시절 반가사유상의 미적·문화적 가치를 로댕(1840~1917)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깊이 있게 배웠다면 하는 아쉬움마저 들기도 했었다.

천년의 어둠에 잠긴 동굴도 찰나의 촛불 하나로 그 모든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부디, 더 많은 불교문화유산의 장구한 시간과 지혜가 지금 마시는 차 한 잔의 유리잔 속, 우리 모두의 시간으로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성진 스님 남양주 성관사 주지 sjkr07@gmail.com

[1791호 / 2025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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