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일본 정토종의 포교와 원흥사 창설 이유

원흥사 창설, 일본 정토종 견제 의도 승려 입성 금지와 해금 시기 동대문 밖에 원흥사 창설 정토종, 부산·인천에서 포교 신앙보다 생존을 택한 입교

2025-08-29     이창익

1895년 4월 23일에 승려 입성 해금이 공포되었지만, 1898년 봄에 다시 한번 승려 입성이 금지되었다. 고종이 교사(郊祀)를 지내러 환구단에 갔을 때, 개운사 승려가 휘장 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구경하다가 고종과 눈이 마주친 일이 있었고, 이로 인해 경무사(警務使)가 엄령을 내려 승려의 입성을 금지시킨 것이다. 당시에 승려들은 대나무로 짠 원형 삿갓을 쓰고 있어서 속인과 다른 차림새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1905년 7월 15일에 일진회(一進會)의 청원을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 심상훈(沈相薰)은 한성부와 경무청이 승려의 성문 출입을 막지 않도록 내부에 요청했고 7월 20일에 허가를 받았다. 따라서 1895년부터 1905년까지 승려의 입성은 여전히 금지와 해금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단발이 일상화되고 승려와 속인의 의관이 구별되지 않자 승려의 입성 금지는 유명무실해졌다고 한다.

1901년 12월 30일 자 황성신문에는 각도 사찰을 총할하기 위해 소흥사(紹興寺)를 창설하여 후일 을사오적으로 분류되는 이근택(李根澤)을 총사장(總寺長)으로 삼고, 부사장(副寺長), 총무(總務), 법주(法主), 총섭(總攝) 등을 두었다는 기사가 실린다. 다시 1902년 1월 6일 자 황성신문에는 소흥사를 원흥사(元興寺)로 개칭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그렇다면 1899년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조선불교 총종무원으로 삼았다는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이조불교’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원흥사는 13도 사찰을 통할하기 위해 20만 냥을 들여 동대문 밖 영미정(頴眉亭)에 창설되었고, 관가(官家)의 의장을 갖추어 양주의 천축사(天竺寺)에서 불상을 옮겨 왔다. 1901년 음력 11월 19일 자로 원흥사 삼강소(三綱所)는 11월 25일, 즉 양력 1902년 1월 4일에 동대문 밖 영미정에서 도총(都總) 원흥사찰 건립 법연(法筵)을 연다는 포달문을 발송했다. 당일 오후 3시에는 서울 부근 32사의 승려 500여 명, 재가 300여 명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고개에 거주하는 일본 정토종 승려 히로야쓰 신즈이(廣安眞隨) 등이 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하며 토론했고, 원흥사 승려 홍명(洪溟)이 답사(答辭)를 했다.

진종대곡파, 본원사파, 일련종의 조선 포교가 주춤하자, 조선 불교 지배를 꿈꾸며 정토종도 1897년 9월에 부산교회소, 1898년 10월에 인천교회소, 동년 12월에 경성교회소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했다. 그 후 조선 전역의 포교 활동을 통할하기 위해 1900년 4월에 히로야쓰 신즈이가 초대 한국개교사장(韓國開敎使長)으로 부임했고, 경성교회소는 정토종개교원으로 개칭했다.

정토종의 교세가 확대되자 1901년 11월경에 궁내부 경위원 총관인 이근택이 일본 정토종의 포교에 저의가 있다는 상서를 고종에게 올렸고, 이후 동대문 밖 별장인 영미정을 매수하여 소흥사를 건축했다고 한다. 히로야쓰의 ‘정토종조선개교지’를 보더라도 원흥사는 정토종의 포교를 방해하고 조선 승려를 모아 일본 정토종 신도를 흡수하기 위해 세워졌다. 따라서 히로야쓰는 원흥사의 개당식에 자신을 대도사(大導師)로 초빙한 것 자체가 괴이한 일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에 조선인은 종교적 의도가 아니라 일본 종교의 정치적 뒷배를 기대하며 정토종에 입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을 배척하여 파면된 관리나 동학 신자조차 일본불교를 정치적 혼란기에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로 여기고 입교하곤 했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91호 / 2025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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