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성지에 세운 한국 도량…전 세계 불자와 법등 나눕니다”

인도 쉬라바스티 천축선원 일군 한경선 불자 40대 중반 부처님 가르침 만나 나눔에서 참된 신앙의 길 발견 갑작스런 남편 사별 겪으며 네팔 오지 불사 동참 인연 인도 천축선원 불사로 이어져 작은 초가집에서 시작한 도량 신행단체·스님·재가자 도움에 250명 수용 가능 대가람으로 “불자들 방문 언제든 환영해”

2025-09-12     박건태 기자
밀양 아란야에서 만난 한경선 불자는 “부처님 성지에 세워진 한국 도량에서 많은 불자님들과 함께 환희심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인도 북부 쉬라바스티.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물며 법을 설한 기원정사가 자리한 성지다.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배경지이기도 한 이곳에 1999년 머나먼 한국에서 온 작은 초가집 하나가 ‘천축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천축선원은 한 번에 250명의 순례객을 맞이할 수 있는 대가람으로 성장했다. 띠풀집에서 출발한 도량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뒤에는 불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보시와 봉사, 행정, 설계·건설, 운영 등을 도맡은 한경선(적조행·75) 총무보살의 원력과 헌신이 있었다.

한경선 불자는 40대 중반까지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집사와 권사로 봉사하며, 교회 안에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린이집을 직접 세우고 원감까지 맡았다. 신앙에 헌신하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지만, 왠지 모를 마음 한구석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특히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목회자가 기업 회장처럼 점점 권위를 행사하는 모습에, 허전함은 곧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로 바뀌었다.

마음이 흔들리던 무렵, 한 친구가 대행 스님의 ‘한마음’ 책을 건네주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만 이해하고 의지했는데, 불교에는 ‘마음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풀리지 않던 갈증이 비로소 해소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깥의 하나님으로 향하던 시선은 점차 내면의 부처님으로 향했고, 그렇게 불교는 한경선 불자의 불성을 일깨우며 그의 삶 속에 시나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교를 더 배우고 싶다는 갈망은 자연스레 스승을 찾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1995년, 그는 양산 금장사에 머물던, 당시엔 수좌였던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알게 됐다. “고아원에 물품을 전달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문득 차를 금장사로 돌리게 됐는데, 그때 대인 스님께서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이 서로 얽히면 인과에 걸립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선행만 좇던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좋다’는 생각조차 집착일 수 있다는 가르침은 굳건했던 신념에 균열을 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순간 “이 스님 곁에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제의 인연은 어느덧 30년,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경선 불자는 매일 금장사를 찾으며 수행에 몰두했다. ‘미륵존 여래불’을 염하며 ‘누구인고?’를 참구했고, 특히 ‘자성이 본래 부처[自性本來佛]’라는 구절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대인 스님은 “초발심자가 처음부터 이런 언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경우는 드물다”며 남다른 인연을 회고했다.

한경선(왼쪽 두 번째) 불자와 대인 스님(맨 오른쪽)이 서울 옛 총무원 청사에서 아들 박병준(오른쪽 두 번째) 씨와 주고받은 신행 상담 편지를 엮은 ‘훈련소에서 온 편지’ 출판을 기념하는 모습.

한경선 불자는 부산 혜원정사에서 발간하던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군에 입대한 아들과 주고받은 신행 상담 편지 40여 통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 당시 조계종 포교원은 “군 포교에 적합하다”며 출간을 제안했고, 조계종출판사가 ‘훈련소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간행했으며, 서울 옛 총무원 청사에서 출판기념식까지 열었다. 이처럼 삶도 수행도 순탄하게 이어질 듯 보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련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1996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울음이 터져 나와야 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 영안실에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부처님,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그러십니까’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불사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대인 스님과 한경선 불자 모두에게 큰 전환점이 됐다. 스님은 1년간 네팔로 만행을 떠났고, 그 길에서 안나푸르나에 사는 구룽족을 만났다. 그들은 “예불을 드릴 절이 없으니 지어 달라”고 간청했고, 그는 남편의 공덕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3000만 원을 보시했다. 안나푸르나 설산과 절벽이 맞닿은 아름다운 땅에서 불사가 시작되는 듯했지만, 곧 같은 장소에 일본 불교계의 거센 물량 공세가 이어졌다. 한 개인의 원력만으론 거대 조직의 힘을 넘기 어렵다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비록 네팔에서의 불사는 뜻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그 경험은 곧 인도 쉬라바스티 불사의 밑거름이 됐다. 처음에는 스님이 수행하고 머무를 작은 토굴을 마련하려 했으나, 눈 앞에 펼쳐진 땅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순간 “불교가 사라진 이 땅에 대승의 씨앗을 심자”라는 원력이 자연스레 피어올랐다.

작은 초가집으로 시작한 천축선원은 한 번에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가람으로 성장했다. 

한경선 불자는 토지 매입을 진두지휘했다. 기원정사 인근 미얀마 절에 짐을 풀고 절터를 물색하자 “외국인이 땅을 산다”는 소문이 퍼지며 값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결국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인도 청년 스쿨라 씨를 고용했다. “일을 잘하면 우리 절 매니저로 삼겠다”고 제안하자 스쿨라 씨는 직접 발로 뛰며 협상을 이끌었고, 마침내 합리적인 가격에 3000평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스쿨라 씨는 20여 년간 천축선원 수석매니저로 일하며 불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땅을 얻은 뒤 가장 먼저 띠풀로 지붕을 얹은 원두막 법당을 지었다. 공간은 비좁고 천장에서는 지푸라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길가에서 안이 훤히 보이니 현지인과 순례객들이 신기해하며 들어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 절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기뻤고, 그 안에서 ‘금강경’을 독송하며 정진을 이어갔다. 이후 법당 옆에 세 칸짜리 집을 지어 스님 방, 보살 방, 객실을 마련했다. 그렇게 시작된 도량은 한 걸음씩 나아가며 차츰 넓어져 갔다.

천축선원이 오늘의 대가람으로 성장하기까지, 한경선 불자는 행정업무는 물론 설계부터 건축, 부대시설 마련까지 실무를 도맡았다. 건축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힌디어를 배우며 하나하나 도량을 세워갔다. 많은 불사를 일궜지만 그는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부대중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들의 시봉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라며 수많은 인연을 떠올렸다.

초창기에는 기원정사에 순례 온 바른법연구원 김원수 법사와 금강경독송회를 이끄는 김재웅 법사가 도움을 줬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인연은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이었다. 개원 첫해부터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규모 순례단을 이끌고 천축선원을 찾았다.

특히 코로나19로 순례객의 발길이 완전히 끊겨 천축선원이 큰 어려움을 겪을 때, 법륜 스님은 물심양면으로 도량을 지원했다. 또 스님은 선원 입구 기둥에 ‘용성조사 유훈 실천도량’이라는 문구를 새겨, 천축선원이 한국불교사 속에서 더욱 뚜렷한 위상을 지닐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지역 주민을 위한 보건소를 선원 내에 세웠고, 보건소 약은 권현옥 108자비손 대표가 후원했다. 중앙승가대 전 학장 보각 스님이 경내 진입로에 세운 보광초·중학교는 현재 경쟁률 5대 1의 지역 명문학교로 자리 잡았다. 또 보현회장을 지낸 서울 아차산 기원정사 주지 설봉 스님은 큰법당의 삼존불과 높이 7m의 석불 불사에 원력을 더했다.

대인 스님의 사제인 삼척 천은사 주지 동은 스님은 불사 초창기부터 늘 함께하며 큰 힘을 보탰다. 특히 3년 전 북인도 대홍수로 선원의 담장이 무너졌을 때, 동은 스님은 대중과 함께 대리석에 ‘금강경’을 한글·영어·한문으로 새겨 세운 ‘담마 월(Dhamma Wall)’ 불사를 이끌었다. 그때 모인 모연금은 공교롭게도 1250만 원이었는데, 마치 ‘금강경’의 1250 비구를 상징하는 듯 신이한 인연으로 남았다.
 

천축선원은 지역사회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경내에 세워진 보광초등학교 입학식 모습. 

수많은 순례객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반야회상 현장에 세워진 한국사찰이라는 의미는 사부대중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때마다 십시일반 보시가 이어졌다. 그렇게 모인 원력은 오늘날 250명의 순례자를 한 번에 맞이할 수 있는 대가람 ‘천축선원’으로 피어올랐다. 자부심을 드러낼 법도 하지만, 한경선 불자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도량의 모든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제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기에 집착 없이 불사를 이어올 수 있었고, 그래서 큰 부담도 없었다”고 담담히 소회를 전했다.

그는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해마다 길게는 여섯 달씩 인도에 머물며 천축선원을 일궈왔다. 그 시간 속에서 수많은 기쁨과 시련을 함께 겪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사미승 교육을 떠올렸다. 현지에 불교의 씨앗을 심고자 인도 아이 여섯 명을 데려와 출가수행자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스스로 발심 출가한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환속하고 말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아이는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출가에 동의했지만, “왜 브라만을 불교로 개종시키느냐”는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경선 불자가 느낀 한계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최근 겪은 가장 기쁜 소식으로 천축선원 수석매니저 바르단 씨의 득녀를 꼽았다. 석가족 출신인 바르단 씨가 올해 1월 아이를 얻었을 때, 마침 정토회 순례단이 도량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법륜 스님은 아이의 이름을 부처님 당시 가장 모범적인 여성 재가신도로 꼽히는 ‘위사카(Visākha)’로 지어주었고, 그 장면을 지켜본 사부대중은 모두 큰 환희심을 냈다고 회상했다.

또 하나 흐뭇한 일은 매년 순례철마다 도량을 찾는 인도 불교도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암베드카르 박사의 불교 개종 운동 이후, 그 후손들이 세월 따라 달라진 모습으로 찾아온다. 처음과 비교하면 옷차림과 언행에서 한층 품위와 자신감이 묻어난다고. 그는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자로서 자긍심을 느낀다”며 미소 지었다.

‘금강경’ 32분의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는 한경선 불자. 생겨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인연 속에서도 그는 늘 여여한 자리에서 천축선원을 일구어 왔다. “제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불교를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만난 뒤에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지요. 앞으로도 많은 불자님이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신 자리, ‘금강경’의 현장에 세워진 한국 절에 오셔서 이 환희로움을 오래도록 함께 나누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한경선 불자의 원력은 작은 도량에서 오늘의 천축선원으로 꽃피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한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발심에 공감한 수많은 사부대중이 힘을 보태며, 부처님 성지 위에 한국사찰이라는 귀한 결실을 이뤄냈다. 그렇게 일군 천축선원은 지금도 불법(佛法)을 찾는 구도자들의 의지처로서 이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고 있다.

밀양=박건태 기자 sky@beopbo.com

[1793호 / 2025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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