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천화상송증도가’ 금속활자본 부정이 ‘증도가자’ 진위 감정도 방해

[유우식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 기고] 판본과 인쇄에 사용되었다는 ‘증도가자’ 논란에 대한 단상 ‘증도가자’ 진위 감정, 번각목판본 아닌 금속활자본으로 해야 그릇된 검증법이 잘못된 결론 낳으면 등재 과정 신뢰성 잃어 국내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가치 밝혀 전 세계에 알려야

2025-10-29     법보

‘증도가자(證道歌字)’는 2010년 9월에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의 남권희 교수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를 1239년에 인쇄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인쇄하는데 사용된 활자라고 언론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모습이 드러났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1377년에 인쇄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또는 ‘직지(直指)’보다 138년, 1455년에 독일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무려 216년 이상 앞선다. 다만, 서지학계에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금속활자본은 전해지지 않고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목판을 새겨 인쇄한 번각목판본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증도가자’는 2017년 정부의 ‘문화재 지정 부결’ 발표가 있었음에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했다는 그 진위여부를 놓고 최근 다시 논란이 일어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월 1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국가유산청 국정감사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조계원 의원이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주해 경북대 산학협력단이 연구를 수행한 결과, ‘증도가자’는 진품 고려금속활자란 결론을 내렸다”며 “이렇게 되면 인쇄본만 있는 직지심경보다도 138년이 앞서는 금속활자가 발견된 것인데 국가적 경사가 아닌가? 그런데 2017년 문화재위원회는 이 같은 결과를 뒤집고 부결을 결정했다. 왜 그런 것인가?”라고 허민 국가유산청장에게 질의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당시 활자의 서체와 주조 조판 등을 비교한 결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하여 조계원 의원은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당시 문화재위원회 간사를 맡던 공무원이 활자의 조판실험 결과를 보고할 때 일부 주요 사항을 누락하거나 통계 분석을 잘못 적용하여 결론이 뒤집힌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증도가자’ 진위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겠다”라는 말로 재검토 의지를 밝혔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크게 두 가지 논리적 모순이 있다. 우선 서지학계는 1239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금속활자본이 존재하지 않고 목판으로 번각해서 인쇄한 목판본만 남아있다는 주장이 ‘증도가자’ 진위여부의 판단의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금속활자 진위여부를 금속활자본이 아닌 번각목판본에 인쇄된 글자의 모양으로 판단하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모조품으로 인쇄한 글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진품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또한 인쇄를 마치고 분해하여 활자를 분류하여 보관하는 활자인쇄의 특성상 인쇄된 글자와 모양, 크기, 서체까지 같은 활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활자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칫 국가유산청의 재조사가 소장 경위가 불분명한 금속활자를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인쇄하는데 사용된 실물이라고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1972년 고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박람회에서 ‘직지’가 공개되었다. 그때까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던 1455년에 독일에서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를 제치고 1377년에 인쇄된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직지’는 1377년부터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프랑스로 반출하기 전까지 우리 곁에 있었으나 그 중요성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기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까지 최이 발문이 포함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판본은 여섯 가지 판본이 알려져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판본에 관해서는 서지학자들 간에도 일부 판본은 금속활자본일 수 있다는 주장과 모든 판본이 금속활자본을 저본(底本)으로 한 번각목판본(飜刻木版本)이라고 하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여섯 가지 판본 모두 1239년 9월 상순이라고 적혀있는 최이 발문이 붙어 있다. 따라서 1239년 9월 상순이라는 시기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고 해서 1239년에 인쇄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여섯 가지 판본 중에서 정확한 인출 시기 또는 목판의 판각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대구본(1472년 6월)과 종로도서관본(1526년 6월)이다.

각 판본은 글자체와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1472년 이전에 인쇄된 공인본과 반야사본, 1472년과 1526년 사이에 인쇄된 대구본과 삼성본, 1526년 이후에 인쇄된 중앙도서관본과 종로도서관본이 서로 유사하다. 그중에서도 네 가지 판본이 매우 유사하다. 1526년 이전에 인쇄된 매우 유사한 네 가지 판본은 1970년대부터 삼성본, 공인본, 대구본, 반야사본의 순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네 가지 판본은 네 가지 판본 모두 전체적인 서체와 형식이 매우 유사하여 같은 목판으로 인쇄한 것으로 인출 시기만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인출 시기의 전후 관계는 인쇄 상태, 획 탈락, 목판의 손상, 종이 질 등의 차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서지학자와 문화재전문위원들의 견해는 삼성본이 가장 빠른 시기에 인출된 것이고 공인본이 가장 후대에 인출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쇄 순서는 공인본-반야사본-대구본-삼성본으로 판명되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여섯 가지 판본간의 차이점을 정리하여 인쇄 시기와 순서를 판단하면 목판본도 여러 번 번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판본마다 글자체의 변형, 삭제, 오자 등이 확인된다. 서지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모든 판본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증도가자’의 서체 비교군의 선택이 진위 판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여섯 가지 판본간의 차이 (글자체의 변형, 삭제, 오자 등이 확인된다.)

여섯 가지 판본에 인쇄된 곧 즉(即), 밖 외(外), 죽일 수(殊), 볼 견(見), 어찌 기(豈), 일천 천(千)자를 비교해 보면 번각 과정에서의 글자체의 변형과 획이 두꺼워짐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본에서는 목판의 손상으로 인한 획 탈락이 다수 확인된다.

여섯 가지 판본에 인쇄된 곧 즉(即), 밖 외(外), 죽일 수(殊), 볼 견(見), 어찌 기(豈), 일천 천(千)자의 비교. (번각 과정에서의 글자체의 변형과 삼성본에서의 목판 손상으로 인한 획 탈락이 다수 확인된다.)

매우 유사한 네 가지 판본에 인쇄된 기리킬 지(指)자와 언덕 안(岸)자를 비교해 보면 공인본의 글자가 다른 판본에 비해서 매우 특징적이다. 번각을 거듭하면서 글자체가 변형되는 것으로 보아 서지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판본은 동일한 목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인쇄시기만 다르다는 주장이 무색하다.

매우 유사한 네 가지 판본에 인쇄된 기리킬 지(指)자와 언덕 안(岸)자의 비교. (공인본의 글자가 매우 특징적이며 다른 판본에서는 글자체의 변형이 확인된다.)

매우 유사한 네 가지 판본에 인쇄된 글자의 크기의 변화를 공인본의 글자를 빨간색으로 채색해서 다른 판본의 글자에 겹쳐보면 번각 회수에 따라서 글자의 획의 두께가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금속활자본인 공인본은 획이 가늘고 글자의 끝부분이 둥그스름하나 나머지 판본의 경우에는 각수가 목판을 조각하면서 글자의 모양에 멋을 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증도가자’의 진위 검증에 목판본의 글자체를 사용해서는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매우 유사한 네 가지 판본에 인쇄된 글자의 크기 비교. (공인본의 글자를 빨간색으로 채색해서 다른 판본의 글자에 겹쳐보면 번각 회수에 따라서 글자의 획의 두께가 넓어진다.)

1239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에서만 확인되는 금속활자의 주조결함으로 인한 인쇄 불량 사례가 들을 문(聞), 서로 상(相), 큰 집 전(殿), 이을 속(續), 받을 록(淥), 꺽을 절(折), 작을 미(微), 죽일 수(殊), 담을 성(盛), 없을 막(莫)자에서 확인된다. 일부 글자에서는 번각목판본에서도 주조결함을 그대로 판각한 경우도 있고 글자를 수정한 경우도 있다. 번각과정에서는 저본의 상태를 그대로 따르려는 경향이 확인된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에서만 확인되는 금속활자의 주조결함으로 인한 인쇄 불량 사례의 일부

앞으로 ‘증도가자’ 진위 검증에는 어떤 판본의 이미지를 사용해야 할까? 과거에는 번각목판본인 삼성본을 사용했으므로 서체 비교 및 통계자료도 무의미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의 검증에서는 금속활자본인 공인본에 인쇄된 서체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활자를 사용한 인쇄의 경우 낱자로 인쇄된 서체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갖는 모순을 극복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필자도 우리나라의 유물의 가치가 올바르게 평가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와 같다. 그러나 검증을 소홀히 하거나 그릇된 검증 방법으로 인하여 잘못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쩌면 문화유산 등재 과정의 신뢰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경우에는 여섯 가지 판본이 남아있고 공인본에서만 발견되는 금속활자 인쇄본의 여러 가지 특성과 다른 판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1239년에 인쇄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해외 학계에서는 필자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여 다수의 논문이 출판되었고 미국인쇄역사협회(American Printing History Association)의 인쇄 연표에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공인본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으로 등재되었으며 여러 가지 국제학술단체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인쇄연표를 개정하고 있다. ‘증도가자’보다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것을 국보로 승격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해당 판본의 보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품에 없는 ‘직지’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전세계에 알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K-Culture의 세계적 인기와도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2023년에는 폴란드의 박물관의 학예사가 인쇄술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에서 초청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필자에게 이메일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금속활자본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여 자료를 제공한 일도 있다. 국가유산청에서도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금속활자본의 인정과 국보 승격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증도가자‘ 진위 검증에는 어떤 판본의 이미지를 사용해야 할까? 과거에는 번각목판본인 삼성본을 사용했으나 앞으로는 금속활자본인 공인본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1799호  2025년 11월 5일자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