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처럼 지혜로운 삶

2025-10-31     성원 스님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달빛은 광활한 가을 하늘을 가득 품어 안고 가을의 정취를 흠뻑 전해준다. 여름과 겨울이 너무 길어 봄과 가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람의 일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 유연 시절을 새봄으로, 청장년기를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으로, 장년기를 지나면 가을에 비유하게 된다. 가을은 여름 내내 무성하던 잎들을 고운 단풍빛으로 물들이고 겨울이 오기 전에 그 잎들을 다 내려놓고 차디찬 혹한의 외로움을 준비한다. 마치 사람의 일생과 계절은 너무 닮았다. 

우리같이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은 어디에다 일생을 비유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여름이 지나가지 않을 듯 맹위를 떨치고 가을비가 여름 장마같이 내린다고 난리다. 이러다가 추수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 걱정이 많다. 계절의 변화가 엉키듯 우리의 삶이 가을의 시기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여름같이 무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활기찬 삶의 모습이 좋아도 보이지만 가을 준비하지 않는 농부처럼 염려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승가도 나이 적체가 심하다. 예전이면 노스님으로 불려질 나이에 종단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사회도 고령화 현상을 인위적으로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다. 승단의 노령화는 사회현상보다 심하다. 조계종에서는 출가 승납 40년 이상 여법히 수행하면 대종사 품계를 받을 수 있다. 종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데 자꾸 세속의 나이 70세 이상에게만 대종사 품계를 주려 한다. 물론 법계위원회의 고민도 이해는 된다. 일시에 너무 많은 스님들이 품수하는 데 따른 파장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집행부의 문제이다. 법계위원회에서 종법의 규정을 운영의 문제로 설정하여 판단하면 안 될 것이다. 승단은 세속 나이에 상관없이 승납으로 좌차를 정한다. 유독 대종사 품계를 승납과 세납으로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종회에서 법령까지 바꾸었는데도 나이의 잣대로 심사하면 안 될 것이다.

계절이 이상하게 흐르듯 우리도 노년의 시간 없이 바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것 같다. 노년이 주는 자유의 시간에 사유를 더해 일생 담아온 지혜들을 잘 정리해서 젊은 세대로 아낌없이 전해주는 일에 힘쓰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 현실에서 보면 노년이 장년보다 더 깊이 승가사회에 몸 담고 활동하고 있어 노년의 지혜로움을 전해 받기가 쉽지 않는 것만 같아 아쉽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은사스님께서 어느 날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지 말라고 하셨다. 담당 의사는 밀려들 고통이 인간이 감내할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스스로 오실 거라며 너무 염려 말라고 했다. 하지만 끝내 병원 가는 일을 마다하시고는 ‘나 이제 간다. 더 살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너희들께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 나 이제 간다.’ 하시고는 죽음을 당당히 맞이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극심한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숙연했다. 마지막 임종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쉼 없이 살아온 당신의 삶의 열정과 지혜를 온전히 다 전해주고 받을 시간들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을이 지나지기 전에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우리 사회에 돌려놓으려 힘써야 할 것 같다. 낙엽이 보여주는 지혜의 가르침 앞에서도 우리 인간들은 왜 이리도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성원 스님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sw0808@yahoo.com

[1799호 / 2025년 11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