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붓다의 전생과 윤회
“윤회는 없다”는 말의 진실 상견·단견 넘은 불교 윤회관 아트만식 윤회와 크게 달라 윤회 방편이고 무아가 정도 상견·단견도 아닌 중도의 길
최근 저명한 승려가 유튜브에서 “윤회는 없다”고 말하여 일반 불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과학 시대에 동물로 태어나는 식의 윤회가 실제로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윤회가 정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필자는 윤회의 유무가 아닌, “무엇을 윤회라고 하는가?”를 되묻는다.
자아가 있으며, 이 자아(ātman)는 육체가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 삶을 계속한다는 의미의 윤회는 힌두교의 윤회관이며,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의 윤회는 아니다. 붓다는 이러한 윤회가 무명(無明)에 기인한 허망한 망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명백히 하고, 무아(無我)를 꿰뚫어 보아 윤회의 미망에서 벗어난 명랑한 삶을 제시한 것이다. 깨닫지 못하면 생사윤회가 있는 것이고, 깨달으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붓다가 성불하기 전에 지은 행적을 담은 ‘본생경’에는 붓다가 다양한 짐승들로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보살장경’과 ‘금강경’에는 연등불 시절에 수메다[善惠] 수행자로 살았고, 도솔천에서 마야부인을 통해 출현하였다고 전한다. 한 개인이라는 존재가 그냥 어느 날 이 세상에 처음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무수한 생명체로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에게는 이러한 윤회를 방편으로 보여주고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힌두교의 윤회관을 가진 이에게는 자아의 허상을 밝혀 무아라는 뗏목을 제공함으로써 윤회의 강을 건너도록 하는 복음인 것이다. 붓다는 ‘독화살 비유경’에서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즉시 화살을 뽑지 않고 화살을 쏜 자가 누구인지, 화살의 재질 등이 무엇인지를 묻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며 이론적인 탐구가 아닌 실천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아트만식 윤회를 상견(常見)이라고 하고, 유물론적 육체적 생사를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불교는 윤회의 유무에 고착된 종교가 아니다. 상견과 단견을 모두 극복한 중도불이(中道不二)의 입장이다. 마치 이 촛불에서 저 촛불로 불이 옮겨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앞의 촛불과 뒤의 촛불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실상은 거대한 생명력의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과학과 물질이 발달하여 유물론적 사고에 경도되어 있는 시절에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인과법칙에 기반한 윤회관이 사람들의 윤리적 삶을 담보하는 데 여전히 임시방편적 유용함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무아의 약으로 치료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동물이나 사람의 전생을 끝내고 보살로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것은 남녀의 성교에 의하여 태어난 타율적 생물학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선 어떤 소명(召命)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석가모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메시지이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 이미 성불하였고,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소식인 것이다.
범부 중생이 안고 사는 자아는 허상의 정체성이다. 법률에서는 이 정체성을 성명, 주민등록번호, 지문 등으로 표상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개인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윤회의 강을 건너려면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해보는 것도 수행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김백영 변호사 bykim8711@daum.net
[1801호 / 2025년 11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