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상, 큰 밝힘으로 드러난 청정심
세상을 다 알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해 명료한 답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무지의 어둠에서 두려움과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학문과 종교는 그것에 대한 탐구와 해답을 나름대로 피력하고 있다. 선명상은 파란 하늘을 가린 구름이 걷혀 찬란히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에 가림이 없어 본래 청정한 마음을 발현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청정한 마음은 여러 겹의 먼지로 둘러싸여 차례로 제거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 안팎의 대상에 대해 붙잡으려 하고, 취착하려 하는 마음 작용이 먼지를 일으킨다. 그 대상의 형상이나 형질에 상관없이 이와 같은 마음 작용을 일으키면 티끌이 청정한 마음을 덮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티끌이 켜켜이 쌓인 몸과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나도 세상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선명상은 표피적인 데에서부터 심층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가림을 차례로 제거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마음의 때는 몸의 욕구와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명상은 몸과 마음 작용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선명상 행자에게는 사불괴정(四不壞淨)이 필수다. 불법승 삼보와 계체구족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번뇌 제거와 지속적인 수행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세상을 보면 나와 세상은 형태적이든 형질적이든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다. 나와 세상은 어떤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인과 연에 따라 생멸을 반복한다. 윤회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 생멸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니 바로 계(界, dhātu)이다. 세계는 중층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명(明, vidyā)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구조를 만나게 된다. 열반에 이른 것이다. 무명(無明, avidyā)이라는 구름이 걷혀 청정한 마음이 발현할 공간이 열린 것이다. 존재는 법칙성이 드러낸 일시적 모습이고, 세상은 법칙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서 열반도 생사와 연생(緣生)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생사즉열반’. 생사와 열반은 윤회와 해탈이라는 정반대의 속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생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사도 자성(自性)이 없고 열반도 자성이 없다고 해야 한다. 스스로를 유지할 독자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 다 완전한 존재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니 다시 물음은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여정이 머묾 없이 나아가는 반야의 길이다. ‘반야심경’은 ‘조견오온개공’으로 시작을 알리고 있다. ‘오온은 있는데 그 자성은 비었다.(空, śūnya)’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법들은 영원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런 안목이 열리면 역으로 ‘빈 것(空性, śūnyatā)’에서는 일체법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 ‘색즉시공’이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법은 ‘빈 것의 드러남(諸法空相)’에 불과하다. 모든 법은 태어난 것도 아니고 생겨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림이 없게 된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뒤바뀐 생각을 넘어서게 되었다.
머물지 않고 붙잡지 않아 모든 차별과 분별이 사라져 일체를 통합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본다. 무성(無性) 무생(無生) 무득(無得)의 큰 밝힘(大明)으로 드러난 청정한 마음은 자비를 꽃피운다.
이욱태 (사)한국수소에너지기술연구조합 이사장 satdharma@naver.com
[1802호 / 2025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