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터는 어떤 곳인가
몽고·일본 등 외세침략과
한국전쟁 등 전란으로 소실
조선시대 배불정책 주도한
유생들의 횡포도 크게 작용
파악된 절터만 5000곳 넘어
문화재 보존관리 118곳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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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목탁소리가 사라진 절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지극히 적다. 하지만 절터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미래를 만드는 세대에게 늘 현재 시점으로 존재하는 민족적 산물이다. 불교는 오랜 기간 동안 국교로서, 국민신앙으로 간직됐고, 사찰은 우리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표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법보신문에서는 절터에 대해 이제는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잘 보존해서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문화재 보존철학 전공자인 이수정 박사의 절터 관련 기고문을 5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1. 절터는 어떤 곳인가
2. 왜 보존해야 하나
3. 법적·제도적 과제는
4. 보존 관리 주체는
5. 복원만이 능사인가
한때는 그곳에 법당과 강원, 그리고 불탑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삼보에 귀의할 수 있었다. 지금은 눈을 감아야 그 모습이 상상될 뿐, 언제부터인가 그 신성한 공간에서 부처님도, 수행하는 스님도, 말씀을 듣고 복을 비는 신도들도 사라졌다. 우리는 그곳을 ‘절터’라 부른다. 가르침과, 수행, 그리고 기도의 공간인 절이 자리 잡고 있었던 터전이었다는 뜻이다.
고요하지만 사람들로 붐볐던 그곳이 사라지게 된 사연은 다양하다. 반만년이라 자랑하는 우리의 역사적 흐름에서 그 원인을 먼저 찾아보면 두 가지이다. 우선 전쟁으로 많은 사찰이 사라졌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불심으로 모아 하나씩 지은 사찰들이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등 주변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그러한 사찰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정성을 모아 중창불사를 벌인 경우도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그대로 폐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주의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주요 공간들이 크게 훼손되었고, 남원의 만복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소실되어 우리에게는 절터로 남게 되었다.
사찰을 공격한건 외부의 침입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동포끼리 싸운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산 속의 많은 절들에 있던 건물들이 폭탄으로 쓰러졌고, 자비를 실천하는 가르침을 전한 부처님의 면전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래서 금강산의 유점사와 장안사는 현재, 터만 남아있다.
절이 사라지는 두 번째 원인을 꼽으라면, 국교가 불교에서 다른 종교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이 땅에 불국토를 만들고자 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적 이념을 소위 국정철학으로 바꾸면서 많은 사찰들이 국가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 하는 사찰은 경내의 불전이나 부속건물들이 낡아도 예전만큼 중창불사를 크게 하기 어려웠고, 신도의 수가 줄면서 서서히 사세가 기울면서 폐사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유생이나 관리들이 사찰을 유희나 휴게의 장소로 사용하면 그에 대한 비용을 사찰이 떠안았고, 그러한 현상을 일부 기록에서는 ‘빈대가 들끓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요즘 말로 파산한 사찰들은 절터가 되었다.
종교적 차원에서 그 역사를 살펴보면 서양의 교회도 우리와 비슷한 사연을 안고 있다. 영국은 우리의 불교에 해당하는 가톨릭, 즉 편의상 우리가 구교라고 하는 종교를 프랑스에서 들여와 중세시대에 수많은 고딕성당을 지으며, 하느님의 세계를 그들의 땅에 열었다. 하지만 1534년에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가톨릭의 규율을 어기고 이혼하려다가 교황청에서 반대하자 교황청과의 인연을 끊고, 지금의 성공회를 만들면서 영국적 신교를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교황 대신 국왕을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모시기를 거부했던 영국 내의 수많은 성당들은 왕명을 받은 군대에 의해 무너졌고, 아름답게 조각한 석조물은 성직자의 피로 물드는 수난을 겪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성당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남은 돌은 귀족들의 대저택을 짓거나 주변의 큰 성당을 보수하는 데에 석재로 사용하기 위해 무참하게 뜯겨 나갔다. 실제 요크셔 지방의 셀비 성당을 보수할 당시에 기록한 작업일지에는 건물의 낡은 부재를 교체하기 위해 폐허가 된 요크시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 건물의 일부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영국의 수많은 성당들은 정치적 상황에 의해 폐허가 된 것도 모자라 인간의 탐욕으로 남아있는 부재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들로 절의 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은 절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현재까지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파악한 절터의 숫자는 5000여곳이 훨씬 넘는다. 이 숫자는 실제 조사과정에서 현재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곳과 대대로 전해오는 여러 문헌에 기록된 곳을 모두 포함한 통계이다.
절터를 파악하는 작업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성종12년인 1481년에 편찬되어 1530년에 증보된 지리서인데, 이 책의 ‘불우(佛宇)’편에는 당시에 종교적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는 사찰을 기록하였고, ‘고적(古蹟)’에는 사라진 절터를 기록하였다. 당시는 억불숭유정책을 펼치던 시대였지만 폐사된 사찰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절터는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곳에 어떠한 형태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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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사찰과 절터에 대해서만 서술한 책이 1799년에 나오는데, ‘범우고(梵宇攷)’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는 당시에 모두 714개의 절터가 있다고 하였다. 그 후 1900년대 초반에 발간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라는 책에서는 그 숫자를 846개로 기록하고 있어서 조사된 숫자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지금 우리가 추정하고 있는 절터 외에도 아직도 더 많은 절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매년 지역을 정해놓고, 순차적으로 절터에 대한 일제조사를 하고 있다. 그 조사가 끝나면 지역별로 얼마나 많은 절들이 남아 있으며, 그들이 지닌 다양한 역사적 정보들이 모아져 남아있는 절터의 현황을 알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절터로 남아있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일부는 그 장소에 사찰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유구가 땅 속에 묻혀있어서 건물을 짓거나 농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초석이 발견되어 정식으로 발굴하고 다시 땅 속에 안전하게 숨어있도록 흙으로 덮은 곳도 있고, 석탑이나 석불, 불상대좌, 당을 걸어두는 기둥을 지지하고 있던 당간지주 등이 남아 그곳이 절터임을 확인해 주는 곳도 있다. 그리고 문헌에 사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찰의 정확한 위치나 사역의 범위가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곳도 있다.
그런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땅에 남아있는 수많은 절터 중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지정문화재로 보존관리하고 있는 곳은 겨우 118곳뿐이다. 확인된 절터의 2퍼센트 정도만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소수의 절터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발굴이나 학술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국가 지정문화재인 사적이나 시도 지정문화재인 시도 기념물, 문화재자료 등의 이름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지정문화재가 되면 국가나 지방정부가 주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하고, 보존관리가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는 등 특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5000여 개가 넘는 절터들은 대부분 우리의 무관심 속에 그대로 방치되어 보존이나 주기적 관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경기도 이천에 있는 표고리사지처럼 소유주가 농사를 짓거나 텃밭으로 가꾸기 위해 유구를 인위적으로 훼손한 곳도 있고, 경기도 분당의 태평동사지와 그 주변에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와 상점과 가정집이 들어서면서 절터였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아주 극소수의 절터만이 우리의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그 많은 절터들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중생들이 정성을 모아 터를 잡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머물렀던 수행과 신행의 공간이었던 절터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좀 더 구체적인 언어와 체계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 절터가 지닌 가치와 중요성에 그것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이자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혁신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과 재원으로 절터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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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박사 slee70@korea.kr
이수정 박사는
이화여대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미술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영국 요크대학에서 문화재보존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불교문화재가 보존돼야 하는 당위성과 함께 바람직한 보존원칙과 법적 제도적 방안에 대해 연구했다. 현재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며 문화재의 보존원칙과 보존의 당위성을 수립하는 연구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