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보존해야 하나

우리 민족 역사가 살아 숨쉬는 보물창고 지키는 일

2013-11-19     이수정

1. 절터는 어떤 곳인가

2. 왜 보존해야 하나

3. 법적·제도적 과제는
4. 보존 관리 주체는
5. 복원만이 능사인가

 


 

 

절터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
오랜 시간 하나의 공동체로
고유의 정체성 갖도록 해줘


일제강점기에는 역사인식
올바로 갖도록 잡지·신문에
절터와 관련인물들 소개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주 사천왕사지.  문화재청 제공

 

 

 

절터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관심도 적은 편이다. 아마도 옛 사람의 불심이 담긴 모든 흔적이 땅 속에 숨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탓에 눈에 보여야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마음을 여는 습성이 생겨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절터에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에도 인색하다.


그런데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그 텅 빈 절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곳에 남아 있는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내려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곳에 머물면서 쌓인 흙을 걷어내는 이들도 있고, 그곳이 후대에까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국가에서 관리하는 목록에 올리기 위해서 누가 지었는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 조사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 나아가 그곳에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없어진 법당을 다시 세우자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절터가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지만 여전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절터에 무슨 의미가 깃들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왜 잘 지켜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첫 번째로 절터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약 2천여년 전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와 삼국에서 공인된 이후, 그것이 국교든 아니든 간에 한국인들이 힘들거나 병들었을 때, 혹은 국가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절에서는 수륙재나 천도재, 영산재 등을 열어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혼령이나 속세에 남은 중생의 마음을 달래주고, 전쟁이나 가뭄과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국가와 백성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었다.


옛 어른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극락왕생 하실 수 있도록 영정을 모셨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세상살이의 고통을 극복해나갔으며,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면서 아들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원을 빌기도 했던 사찰이 있었던 곳이 바로 절터다. 그래서 우리는 절터가 정서적인 가치,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절터는 단순히 종교적인 기능과 신앙체계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 동안 우리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고유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늘날의 불교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덜 영향을 미치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은 한국을 불교문화에 뿌리를 둔 나라로 인식하고 있고, 불교에 바탕을 둔 종교적 관습과 문화가 한국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그리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한국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적 지주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절터에는 마음을 열고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부여의 왕흥사는 577년에 백제의 위덕왕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을 위해 지은 절인데, 절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절터의 뒤쪽과 양 옆으로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주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절은 660년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에 의하면 왕흥사는 그 앞에 흐르는 금강 쪽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경내에는 아들을 위해 지었다는 목탑이 있었던 목탑지와 부처님을 모신 금당지, 그리고 그 뒤에 강당지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은 사찰의 동쪽 옆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강변을 걸으면서 바람과 함께 흔들리는 갈대밭을 지나야 하고, 사찰 입구 즈음에서 산쪽으로 사역을 올려다보면 사찰이 있었던 아늑한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왕흥사가 지어진 사연을 아는 이는 아마도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픈 마음을 나도 모르게 떠올릴 것이고,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위해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그곳의 건물과 불상이 한줌의 재로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많은 생각과 감상들을 느끼면서 중심 경내로 들어올 때쯤이면 절터가 주는 묘한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영국의 화가 터너가 19세기에 그린 틴턴 성당지.

 

 

19세기에 서양인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성당지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보면서 예술적·문학적 영감을 얻었다. 그러한 공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져들게 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예술적 감흥과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풍을 오거나 화가들은 일부만 남아있는 성당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판화로 찍어 색을 입혀 팔기도 했다.

 


그러한 미적 감흥은 대개는 대상물의 형태, 크기, 색상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서 느끼기 때문에 여주의 고달사지처럼 절터에 탑이나 부도, 또는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으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쉽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구가 적어서 큰 시각적인 감흥을 주지 못하더라도, 절이 있었던 공간의 자연 환경이나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이 절터가 속삭이는 이야기와 어우러지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적 감흥이나 감성을 일으킨다.


세 번째로, 절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왕권강화를 위해 창건된 경주의 황룡사나 익산의 미륵사는 절터로 남아 있고,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염원으로 지은 경주의 사천왕사와 감은사, 그리고 강화도의 선원사 역시 절터로 변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왕실과 민중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절터가 되었지만 양주의 회암사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찰이었고, 광양의 중흥사지는 임진왜란 당시에 왜구에 맞서 싸우는 승병의 근거지였다.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터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역사 속의 인물이나 그들의 활동이 절터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절터가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만이라도 올바르게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잡지나 신문에 절터를 소개하거나 절터와 관련된 인물이나 사실들을 기고하기도 했다.


1928년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홍순혁은 ‘조선의 미술자랑’이라는 제목으로 시대별 국보를 소개하는 글을 소개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9층탑을 만들어낸 건축적 기술이 일본의 법륭사와 같은 사찰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목에 힘을 주어 강조하고 있다. 또한 1939년 이상인은 ‘삼천리’라는 잡지에 신라의 화가 솔거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소개하면서, 그의 역작인 황룡사 금당의 벽화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하고, 독자들에게 황룡사지에 답사할 때 솔거의 위대함을 되새겨 볼 것을 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절터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있는 보물창고이다. 땅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이 서있던 기단이나 기둥을 세웠던 초석들이, 그리고 곳곳에 함께 묻혀버린 불상이나 전돌, 기와 등과 같은 유물들이 발굴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서 우리에게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나 자료들을 선물로 쏟아낸다.


우리는 그것들을 토대로 과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아이들을 가르칠 교과서를 새로 쓰거나 고칠 것이며, 그걸 배우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다시 그 절터에 찾아올 것이다. 경주의 사천왕사지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하는 과정에서 건물지와 함께 동쪽의 탑이 있던 다리에서 탑의 기단 면석으로 사용한 전돌을 찾았다.

 

 

▲경주 사천왕사지 동탑 기단 출토 녹유신장벽전.

 


전돌의 표면에는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던 신장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탑을 어떻게 장식했는지, 그리고 당시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2009년, 미륵사지의 서쪽에 있는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의 외부에는 백제의 귀족성씨 중의 하나인 ‘사’씨가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기존에 ‘삼국유사’를 통해 선화공주가 창건했다고 알고 있었던 사실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렇듯 아직 발굴되지 않은 전국의 수많은 절터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유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통해 다음 세대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절터는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바꿔 마음의 눈을 여는 순간 더 큰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절터 위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머리 속에 옛 금당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국불교를 펼치고, 왕실의 안녕을 빌고, 솔거와 같은 대 화가가 작품 활동을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가족의 극락왕생을 비는 옛 선조들의 마음을 읽어낼 것이다.

 

▲이수정 박사
 
그 절터가 우리에게서 잊혀지는 순간 우리의 삶도 함께 잊혀질지도 모른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절터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이다. 

 

이수정 박사 slee70@korea.kr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