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맣게 물든 하늘 곳곳에서 별이 빛났다. 어제 밤 내리친 번개와 폭우가 잿빛 구름을 몰고 간 덕분이다. 청명한 밤하늘을 가슴에 담고 다실에 들어갔다. 정돈된 자리에는 대륙의 차인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발을 벗고 가부좌를 한 모습은 어색함보다 진지함이 앞섰다. 고요한 가운데 한국 차인들이 맑은 녹차를 우려냈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놓인 백자와 분청 잔에 차를 담자 은은한 향이 사방에 퍼졌다. 차를 마시고 입정에 든 이들의 코끝에는 자연스레 숨이 들고 나왔다. 10분의 정적.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저마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우주적인 경지가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일 것 같다”, “마음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는 소감에 긍정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3월29~30일 中 취암선사서 개최
해외에 선차수행 소개한 첫 자리
사라수·천처·현로 등 다법 시연
“다선일여 정신 구현했다” 찬사
25일, 복건성 자국사서 4회 대회
일본·대만 등서도 선차아회 계획
선과 차의 아름다운 소통, 선차아회(禪茶雅會)가 대륙을 향했다. 조계총림 송광사, 양평 용문선원에서 열린 첫 회와 두 번째 선차아회가 차(茶)를 주제로 열린 템플스테이였다면 지난 3월29~30일 중국 강서성 남창의 박원표설 차수행센터와 취암선사에서 열린 선차아회는 산중이 아닌 재가의 일상에서 차를 마시며 수행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선차아회가 국내에서만 전개되는 행사가 아니라 중국 나아가 세계인과 공유하는 선차 수행 프로그램이라는 이정표를 분명하게 밝히는 ‘세계 선차아회’의 출발이 됐다.
상해에서 고속철도로 7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을 꼬박 날아가야 도착하는 강서성 남창에는 행사 전날 폭우가 쏟아졌다. 걱정은 기우였다. 어느새 맑아진 하늘아래 진행된 개막식은 봄꽃의 향연으로 풍성했으며 비행기의 연착으로 도착이 늦어진 한국 일행을 염려하는 중국 차인들의 환영인사는 선차 수행에 대한 이들의 진심어린 열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행사가 진행된 박원표설 차수행센터는 산림공원 내 위치해 있어 자연 속에서 차를 맛보는 기쁨을 더했다.
선차아회의 가장 큰 특징은 차를 통해 수행을 한다는 데 있었다. 차를 다리는 행위나 차 맛으로 선을 표현하는 것은 물론이며 참가자들이 모두 차를 마시고 입정에 드는 시간으로 수행의 묘미를 나눈 것이다. 한국대표단 20명을 포함해 행사 참가자를 60명으로 제한했음에도 중국 전역에서 차 전문가들과 차를 배우는 학생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점도 의미가 컸다.
이렇다 보니 행사의 매 순간이 진지했다. 개막식에 이어 야외에서는 중국 북경 화정원(和靜園)이 ‘관음옥로(觀音玉露)’ 다법을 선보였다. 저녁 공양 후 다실에서는 한국 숙우회(熟盂會)가 헌다의식인 ‘사라수(娑羅樹)’와 헌다와 명상차가 포함된 ‘천처(淺處)’ 다법을 선보였다.

“중국 화정원의 관음옥로는 복사꽃과 선의 향기가 휘날리는 속에서 진여법성의 맛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면, 한국 숙우회의 천처는 차 행위의 예술에 선 수행을 융합시킨 다선일여 정신의 구현이었다. 시연자들의 고요한 몸동작과 손동작, 명상 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의 핵심에 바로 들도록 했다.”

중국 차전문지 ‘끽다거’ 서만 편집장의 소감에는 현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이날의 마지막 순서였던 ‘명상차회’는 숙우회가 ‘청풍(淸風)’이라는 다법으로 한국과 중국 차인들에게 맑은 녹차를 돌리고 차를 마신 뒤 명상에 드는 순서로 진행됐다. 중국 측의 참가자들은 차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대부분 차 한 잔과 함께 명상에 든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도 선차아회의 의미를 확인하게 했다.
다음날 참가자들은 남창에 소재한 취암선사(翠岩禪寺)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대중 스님이 참여한 가운데 한·중 차인들의 헌다의식과 스님들이 이끄는 보차의식이 진행됐다. 대웅전 앞에서 숙우회는 ‘현로(玄路)’라는 다법을 선보였다. 정화의식에 이어 부처님과 스님들께 차를 올린 다음 차인들도 차를 나누어 마시고 입정에 드는 다법이었다. 허공에 뿌리는 가루 향과 땅에 뿌리는 꽃잎으로 그리는 원상, 입정을 마친 차인들의 느린 걸음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진리와 깨달음을 구하는 지난(至難)한 ‘길 없는 길’의 표현이다.

취암선사는 선차아회 일행들에게 보차(普茶)의식에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보차의식은 중국 선종사찰 전통의 발우공양과 차 공양이 더해진 것이었다. 한국의 발우공양과는 도구와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공양을 받는 마음, 공양 그릇을 비우고 그 그릇에 다시 차를 따라 마시는 의식은 일치했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가 선불교의 정신으로 이어져 있음을 몸소 체험한 귀한 시간이었다.
선차아회는 오는 4월25일 중국 복건성 자국사에서 제4회 행사를 갖는데 이어 일본, 대만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선차아회를 기획한 최석환 월간 ‘차의 세계’ 대표는 “중국에는 수만 개의 찻집과 헤아릴 수 없는 차인들이 있지만 정작 차를 통해 수행을 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동안 대륙에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차인들이 선차에 눈을 떴다”고 설명했다. 이어 “차인들이 차에 담긴 수행의 가치를 발견하고 수행자의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며 “선차아회는 국경을 넘어 선차 수행의 길을 직접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웨이화 강서다관연맹 회장은 “선차아회는 참여도 측면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감동이 큰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곳 남창은 선과 차 문화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백장사가 있고, 백장사는 올해 차 행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선차대회’가 열리는 장소”라며 “선차아회에서 맛본 수행의 감동이 이어지도록 9월25일 열리는 선차대회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1박2일 동안의 선차아회를 마치면서 한국과 중국의 차인들은 미소로 손을 맞잡았다. 이들이 함께 펼친 선차아회 깃발의 붉은 글씨가 연분홍 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다. 오는 9월 백장사에서 열릴 선차대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차인들은 선차 수행으로 내면을 닦아나가겠다는 약속도 함께했다. 재회의 순간, 선차의 불꽃으로 마주할 이들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중국 남창=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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