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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오안(五眼)
 무문
 2015-11-04 18:54:39  |   조회: 2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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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오안(五眼)

불교의 8만 대장경을 거꾸로 달달달 외우고,
1천8백 가지의 화두에 정통해도
오안(五眼)이 열리지 않으면
그 깨달음을 한 번쯤은 의심해 봐야만 한다.

깨달음은 견성으로, 성품을 보는 것인데
그것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인
지혜의 눈으로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깨달으면 보살 또는 부처와
비슷한 레벨이라는 의미이기에
당연히 보살 또는 부처의 눈인
오안(五眼)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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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안 (五眼)

오안이란 다섯 종류의 눈이란 뜻이다.

첫째는 육안(肉眼),
둘째는 천안(天眼),
셋째는 혜안(慧眼),
넷째는 법안(法眼),
다섯째는 불안(佛眼)을 말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이(第二)에
「보살(菩薩)마하살이 오안(五眼)을 얻으려 한다면
항상 반야(般若)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제33에 이를 해석하여
「무엇이 다섯인가 하면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다.

육안(肉眼)은 가까운 것은 보나 먼 것을 보지 못하고,
앞을 보나 뒤를 보지 못하고, 밖은 보나 안을 보지 못하며,
낮은 보나 밤을 보지 못하고, 위는 보나 아래를 보지 못한다.
이러한 걸림이 있기 때문에 천안(天眼)을 구(求)한다.

천안(天眼)을 얻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모두 보고,
앞뒤, 안팎, 낮과 밤, 위아래를 보는데 걸림이 없다.
이러한 천안(天眼)은 인연(因緣) 화합(化合)으로 생긴
가명(假名)의 존재를 볼 뿐 실상(實相)은 보지 못한다.
말하자면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
무생(無生)이며 무멸(無滅)이다.
앞도 같고, 중간과 뒤도 역시 같다.

그래서 실상(實相)을 알기 위해서 혜안(慧眼)을 구(求) 한다.
하지만 혜안(慧眼)으로는 중생(衆生)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일이(一異)의 상(相)을 멸(滅) 하고,
여러 집착(諸着)을 멀리 떠나,
일체법(一體法)에 구애(拘碍) 받지 않는다.
지혜(知慧) 스스로가 안에서
멸(滅) 해 버린 것을 혜안(慧眼)이라 한다.
그러나 혜안(慧眼)은 중생(衆生)을 제도(濟度) 하지 못한다.
이유인즉, 분별(分別) 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안(法眼)을 구(求) 한다.

법안(法眼)은 사람으로 하여금
법(法)을 행해 도(道)를 얻게 하며,
모든 중생(衆生)의 방편문(方便門)을 알고,
도(道)를 증득(證得) 하게 한다.
법안(法眼)은 널리 중생제도의 방편도(方便道)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佛眼)을 구(求) 한다.

부처님의 눈( 佛眼)은 세상 일에 모르는 바가 없고,
은밀히 감춰져 있는 것도 보아서 모르는 것이 없다.
부처님 이외의 사람에게는
지극히 먼 것도 부처님께는 지척이며,
캄캄하고 캄캄한 것도 부처님께는 환히 드러나며,
의혹이 가는 것도 부처님께는 간단히 결정되며,
미세(微細)한 것도 부처님께는 큰 구멍과 같고,
아주 깊은 것도 부처님께는 극히 얕다.
이 불안(佛眼)은 들을 수 없는 것이 없고,
볼 수 없는 것이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없으며,
사유(思惟)할 바가 없다.
일체법(一體法) 가운데
불안(佛眼)은 항시 비추고 있다.」고 하고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 第 25末에는 석명(釋名) 등의
8門을 세워서 오안(五眼)의 뜻을 자세히 설했는데,
그 가운데 취인 분별(就人分別)의 하(下)에,

범부(凡夫)에게는 오직 육안(肉眼), 천안(天眼))의
둘만 있고, 나머지 셋은 없으며,
이승(二乘)은 그 뜻이 한 가지로 정해지지 않고,

만일 관입(觀入)의 순서에 의하면
법안(法眼), 육안(肉眼), 천안(天眼)을 갖추고,
종적 기용(從寂起用)에 의하면
혜안(慧眼), 육안(肉眼), 천안(天眼)을 갖추며,

또 보살(菩薩)은 관입문(觀入門)으로 나아가면
혜안(慧眼), 육안(肉眼), 천안(天眼)을 갖추고,
기용(起用)에 의하면
법안(法眼), 육안(肉眼), 천안(天眼)을 갖추며,

부처님(佛)은 오안(五眼)을 모두 원만히 갖추고 있다고 하며,

또 다른 해석으로는 육안(肉眼)은 범부(凡夫),
천안(天眼)은 천인(天人),
혜안(慧眼)은 이승(二乘),
법안(法眼)은 보살(菩薩),
불안(佛眼)은 부처님이 얻은 바의 눈이라고 한다.

또 천태(天台)는 인위(因位)에는 전사안(前四眼),
과위(果位)는 불안(佛眼)이라 설하며,
또, 장통 불원(藏通別圓)의 사교(四敎)에
각 오안(五眼)의 뜻이 갖지 않으며,
밀교(密敎)에 있어서는 횡평등(橫平等)의 뜻에 의하면
오안(五眼)에 우열(優劣)이 없고,
전사안(前四眼)의 덕(德)은 모두 불안(佛眼)과 같다고 한다.
또 밀가(密家)에서는 전적으로 불안(佛眼)을 존중하고,
이를 불격화(佛格化)하여 불안존(佛眼尊)이라 칭(稱)하며,
불안인(佛眼印)에는 오안(五眼)을 구족(具足)하고 있다고 설한다.
(望月佛敎大辭典)

이상은 눈(眼)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무슨 일을 판단(判斷)할 때 육근(六根)의 작용(作用),
그중에서도 보고 듣는 작용을 통해 판단(判斷)을 하고
그 판단(判斷)에 따라 행동(行動)을 한다.
그러니까 미혹(迷惑)한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면
미혹(迷惑)한 판단(判斷)을 하고
그 판단(判斷)에 따라 미혹(迷惑)한 행동을 하여
결과적(結果的)으로 번뇌(煩惱) 망상(妄想)의
고통(苦痛)을 당하여 괴로워하는 것이다.

육근(六根)의 작용(作用) 중에서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인식(認識)을 뜻하기 때문에
본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바르게 본다는 것은 바른 인식(認識)을 의미(意味) 하고,
잘못 본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認識)을 뜻하며,
결과적으로 바른 행동과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즐거움과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안(肉眼)만의 욕심(慾心)이 가득한
미혹(迷惑)한 인생(人生)을 살지 말고,
또 천안(天眼)이나 혜안(慧眼)의 자기만의 수행에 힘쓰는
이기적(利己的)인 소승(小乘)의 태도를 버리고,
보살(菩薩)의 법안(法眼)을 구족(具足) 하여,
부처님의 하시는 일을 도와 드리고 부처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인생(人生)을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보살(菩薩)의 법안(法眼)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부처님의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항시 읽고,
외우고, 생각하고, 염(念) 하고, 행해야 한다.(終)

출처,
http://www.jisangsa.or.kr/bbs/board.php?bo_table=bub02&wr_id=25
2015-11-04 18: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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