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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불교비판 원인이 중국불경의 산스크리트 원전에 대한 번역 오류??

닉네임
무문
등록일
2015-12-13 15:53:06
조회수
3628
내용이 꼭 공부해야만 할 것 같아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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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불교 비판에 대한 검토 :
불씨잡변(佛氏雜辨)의 유교와 불교의 동질성과 이질성을(儒釋同異之辨) 중심으로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우연히 보고, 정도전이 어떻게 하여 불교를 그렇게 비판하였는가가 궁금하여 이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불교에 대한 비판을 보고는, 왜 그가 그런 불교의 이해를 갖게 되었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니, 어이없게도 그가 인용한 구절들이 중국어로 애초에 잘못 번역되어 있었고, 이 잘못 번역된 내용을 근거로 정도전이 '불교는 이런 거구나' 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전에 기술에 있어 언어적 혼란이 얼마나 심하게 무익한 논쟁으로까지 번지고, 이로인해 이후 조선을 관통하여 불교가 탄압당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는  얼마나 가공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를 이 정도전의 논고를 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란들은 비단 정도전의 불교 비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거의 대부분의 인문학의 논란들이 실은 진실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이런 스스로 꼬여진 언어적 혼란 때문에 야기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이런 논고의 검토는 또 다른 의의를 가질 것이다. 이를 보고 마냥 우스개 꺼리로만 여길 수도 없는 게,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언어적 오류를 진실로 삼는데서부터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정도전의 불교의 비판을 보면, 정도전이 학문적으로는 상당히 깊게 불교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여말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논고를 보면 그의 이런 면목이 보인다. 그러므로 정도전의 비판을 일방적으로 불교를 비하하거나 훼손하려는 관점으로만 매도하지 말고, 정당한 문제 제기로 다시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한문 불경의 쓰인 바 그대로라면, 정도전의 지적은 매우 정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불경 구절들은 이처럼 정도전과 같은 그 시대의 석학이 봐도 오해하기 딱 좋게  매우 모호하게 한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물며 정도전 같은 당대이 지식인이 이같은 오해를 하는데, 나머지 일반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엉망임을 알 수 있겠다. 즉 대다수가 모두 잘못된 번역된것을 숭상하여, 이를 기반으로 이해를 하고, 또 그것이 옳으려니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잘못 번역된 불경에 기초하기 때문에, 도리어 이런 오판의 소스를 제공한 불교에서 오히려 반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불경 번역에서 오역이 많이 가미돼 있지만, 정작 이런 오역의 문제점을 심가하게 지적하고 또 이를 반성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불교는 이러한 정도전의 불교 비판 이후로, 조선조내내 숭유억불 정책을 전면 시행하여, 이후 조선조 5백 년간 불교는 혹독한 탄압 대상으로 되어 버리는데, 어떻게 보면 이런 단초를 제공한 업보라고 보는 것은 전적으로 비약일까?  

 

일단은 이 논고를 논하기 이전에 불교와 신유학의 태동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신유학의 발생 과정

 

원래 유교의 사서 삼경 중에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은 지금처럼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으로 따로 전하지 않고, 예기(禮記)의 일부분으로만 전해지던 것이었다.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은 당/송 이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 지를 그 이전에는 잘 몰랐거나 혹은 이를 심법으로 중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대학(大學)은 원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으나, 송나라 때 주희가 이를 따로 분리하여, ‘대학’으로 독립시켰고, 중용(中庸) 역시 예기 제31편 중용 편에 속한 글이 였으나, 역시 성리학의 개창자인 주희에 의해 ‘중용장구’로 독립된 것이다.

 

그럼 왜 이런 것이, 당/송때 다시 강조되어 재 발굴되었냐 하는 점은, 바로 선불교의 등장 때문이다. 선불교가 당/송 시대에 대대적으로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불교적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드디어 알기 시작하였고, 이런 새로운 인식의 등장에 따라, 유교도 이런 측면을 따로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선불교의 이런 대대적인 공세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대학’과 ‘중용’이며, 이것이 조선 5백 년간을 지배한 성리학(性理學)의 기초가 된다.

 

중국에서는 '당/송' 때부터 과거 제도의 도입으로, 가문과 학연과 지연이 아닌 실력으로 무장한 참신한 신진 사대부가 대거 등장하는 데, 이들은 새로운 사조인 선불교에도 크게 매료되었다. 중국 불교는 남북조 시대에부터 중국에 퍼지고, 선불교가 당나라 시대에 이르면 매우 성행을 하게 된다. 특히 식자층에 유행하여, 상당수의 사대부들이 불교의 깨달음을 맛보게 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하여도, 당나라 때의 육긍대부(陸亘大夫)는 유명한 ‘‘병 속의 거위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라는 화두를 남기며1 남전(南泉普願)선사의 법을 잇고, 영의정인 배휴는 ‘여기 걸려 있는 화상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라는2 질문에 대한 황벽선사(黃檗禪師)의 대답에서 그의 법을 잇게 된다. 백거이(=백낙천)은 조과도림(鳥棄道林)의 제자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시인인 송나라때의 소동파는 상총(常聰)선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 법문에서 그의 법을 잇는다.3 여기서 거론한 것 이외에도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은 선불교를 접하고 이를 체득하면서, 이후의 중국의 사상적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되자, 유교 쪽에서도 죽은 유교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깨달음의 전통의 재 발굴 입장에서 그 근거를 기존 경전에서 찾기 시작하고, 주희(朱熹, 1130년 ~ 1200년)는 이를 ‘예기’에서 찾아내, 이를 ‘대학’과 ‘중용’으로 별도의 책으로 분리하여 유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사서삼경 중의 ‘사서(四書)’라 칭하면서, 이를 중요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이것을 슬며시 불교와 다른 유교적 깨달음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내용상 선불교에서의 그것을 기준으로 유교 경전 안에서 다시 찾아낸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것이 소위 말하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인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의 모태는 바로 선불교가 바탕이 되어 공자가 재해석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신유학이라 불릴 성리학은 나름대로 이런 바탕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유교라기보다는 불교의 교설과 궁극적으로 같아 질 수밖에 없다. 이런 연고로, 양자의 사용 용어 등은 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의 지적한는 바대로, 서로 매우 유사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 이에 적확한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기존 용어들을 차용하여 불교용어를 붙였기 때문에 그리된 측면도 물론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용어를 차용하여 불교를 설명한 것이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만약에 저간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양자가 궁극적으로 같아야 하는 데, 어떻게 하여 정도전은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오히려 척결의 칼을 빼든 것일까?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에서 중국어로 번역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끼어드는데, 이런 이는 두 언어 간에 언어 구조의 차이로 이런 오류가 불가피하다. 이런 근원적 문제 때문에, 언어적 혼란을 아예 배제하고자, 경전을 아예 버려 버리자는 선불교가 등장한다. 중국어는 산스크리트어와 언어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 번역이 애초부터 언어 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산스크리트로 봐도 쉽지 않은데, 중국어로 보면 볼수록 잔머리만 뱅뱅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이런 경전의 번역의 오류와 모호성에 대해서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자기네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어째튼 이런 언어적 문제점으로 이런 깨달음에 반하는 여러 가지 경전들이 시중에 유통이 되는데, 정도전은 이런 잘못된 것을 주워다가, 이런 저간의 연유도 모르면서, 마치 유교의 관점으로 보니 너희가 이렇게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실은 정도전이 불교를 배척하는 성리학의 주장이 바로 불교의 주장이다. 즉 정도전이 지향하는 성리학의 추구점이 바로 불교의 추구점과 기실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정도전의 주장의 문제점은, 그 이해의 수준이 미진하여, 이 성리학의 주창하는 바도 정확히 알았다고 볼 수도 없다는데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의 불교 비판에서 내세우는 여러가지 그의 주장들을 검토해 보면, 어떤 것은 틀리지만 그런대로 이해가 가는 것도 물론 있지만, 때로는 전연 그 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터무니없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수준의 이해라면, 불교와 같은 성리학의 요지도 명확하게 이해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그의 문제점 있는 그의 견해를 '성리학'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미진한 것이 된다. 

 

여하튼 정도전은 잘못 번역된 불경의 구절들을 전거하여, 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이해한 관점으로 불교를 그렇다고 규정하고는, 이것이 불교의 문제점이라 하여 불씨잡변에서 공박하고 있다. 정도전은 당대의 지식인답게 불교를 상당히 깊게 연구를 한 것은 사실이고, 그가 전거한 불교의 내용도 핵심 구절에 해당하다. 예를들면, 정도전은 금강경의 應無所住而生其心을 전거하였는데, 이 구절도 사실은 부처님의 경지가 아니라, 실은 보살들이 방편으로 행하라고 설해지는 것일 뿐인데, 그의 견해를 보면, 이것이 '방편 교설'이라는 것을 모르고, '궁극 교설'이라고 여기고 있다. 즉 그렇게 말하는 저간의 취지를 저버리고, 머리와 꼬리는 잘라 버리고, 한 구절 그것만 가지고 드려다 본다. 



이 글 하단에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을 첨부해 두었다. 정도전의 견해와 산스크리트 원문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직접 대조해 보면 정교한 산스크리트어가 어떤지 이해하게 될것이다. 산스크리트로 볼 때는 문법적으로 '긍정/부정' 및 '사역의 능동/수동'등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산스크리트 언어는 단어의 형성에서부터 문장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교한 체계로 조직되어 있고, 언어가 불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언어도 불교의 법대로 조성하여 놓았다. 허투루 조직된 것이 하나도 없이 매우 정밀하게 조직된 언어체계이다. 

순서도 앞/뒤에 따라 그 늬앙스가 달라지는데, 요약을 하면, 우리말과 산스크리트는 언어 구조가 같아, 조선 사람들은 이런 미묘한 늬앙스를 산스크리트로 보면 바로 알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언어의 미묘한 부분까지 기술이 되므로,  따라서 그 원래 지시하는 바를 보다 정밀하게 가르킬 수가 있다. 이런 늬앙스를 한국인들이 알수 있는 것은 우리말이 바로 이렇게 운용되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인 화자에게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파악이 되어 버린다. 4



사실 불교는 언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 언어에 뭐가 있다고 여겨서도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붇다의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언어를 경유하지 않으면 전달할 길이 없으므로, 하는 수없이 언어에 구조에 의지하는 것이다. 또 전달에는 정확성이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이 언어 전달 구조가 중국에 오면서 그 근본 언어 구조가 달라져, 원래 기술 구조가 상당히 엉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로 한문의 불분명한 부분은 재 조명을 하여 그 종지를 분명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와중에, 어떤 행운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람은 이런 범어를 보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금방 이해가 되므로 이를 통해 판정해 보라는 의미이다.   

................ 중략.

출처, http://blog.naver.com/joonghyuckk/220491801362
작성일:2015-12-13 15:53:06 58.143.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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