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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 비판 1 ( 어제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과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같은가? 다른가? )

닉네임
무문
등록일
2016-02-29 22:26:30
조회수
3903
결정론 비판 1 ( 어제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과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같은가? 다른가? )

1. 나는 왜 결정론을 비판하는가?

이미 앞에서 전술한 (힌두불교 결정론 비판-1)에서 언급하였듯이 불교의 창제자인 석가모니는 초기불교의 삼세 인과론에서 결정론을 반대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론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의 양자론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론은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론이나 5계의 윤리론에도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논한다면 결정론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카스트제도나 봉건 제도를 합리화시키며 5계의 윤리를 파계시키기 때문이다.

2. 시간론 비판

결정론에서는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한편의 영화가 2시간 안팎에 걸쳐서 펼쳐지듯이 인간의 인생 역시도 한편의 영화처럼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쫙 펼쳐지기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는 극히 카스트나 봉건제도에서나 볼 것 같은 계급제도적인 발상이다.

왜 계급제도적인 발상인가? 조선시대의 양반-상놈이나 봉건제도의 귀족-노예, 카스트의 브라만과 천민의 계급이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손 대대로 정해지기에 미래가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발상은 이미 계급제도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5계의 윤리를 파계시키며, 공덕을 베풀 기회 역시도 사라진다. 눈앞에 열흘 쫄쫄 굶은 아이가 불쌍해서 죽이라도 한 그릇 주고 싶어도 결정론에 의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한국의 유명한 만화인 (광수생각)에도 나왔던 내용이며, 불교의 원리를 모르는 초보자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론이기도 하다.

어제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과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같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거대한 두루마기가 아니라 1초에 24프레임으로 구성된 조립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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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ㅡ 영화 필름 한 장. 일명 콤마(comma)라고도 한다.

영화 필름이 노출을 위해 카메라 애퍼처(aperture) 앞에 순간적으로 멈출 때 한 프레임의 이미지가 필름에 기록된다.

이 필름을 현상하고 포지티브로 프린트하면 연속적인 동작의 한순간을 기록한 한 장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장의 프레임을 스크린에 연속적으로(무성 영화 시절에는 1초당 16프레임 이상, 유성 영화의 경우는 1초당 24프레임) 영사하면 관객들이 느끼는 잔상 효과로 영상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임 크기는 필름의 가로 길이를 밀리미터로 나타내는데 카메라 애퍼처도 필름의 크기와 똑같다(예를 들면 8mm, 16mm, 35mm, 70mm).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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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반적으로 1초당 낱개의 24장의 필름을 붙여놓고 영사를 하면 인간의 눈에는 착시효과로 인하여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2시간짜리 영화 한편은 (1초 x 24프레임 x 7200초(60분이 3600초) = 172,800의 낱장의 필름을 풀로 길게 이어붙인 거대한 조립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실제 인간의 시간은 과연 결정론의 주장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영화처럼 한 번에 쫙 펼쳐져 있을까? 그러나 실제의 시간 역시도 영화에서처럼 낱개의 필름을 하나로 길게 이어붙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불교철학에서는 이것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도 표현한다. 지금 1초라는 시간도 현미경적으로 분석해서 들어가면 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24장 이상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며 끊임없이 찰나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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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kşaṇa, 刹那 )란 무엇인가?

(1) 어떤 일이나 사물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2) 한 생각 일어나는 시간 매우 짧은 시간.

(3) 불교적 시간개념에 있어서 가장 작은 시간단위.
지극히 짧은 시간.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

(4) 싼스끄리뜨의 끄샤나를 음역한 말. 일념(一念)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따르면 찰나는 2명의 성인남자가 카시국에서 생산된 여러 가닥의 명주실을 붙잡고 잡아당기는데, 또 한 사람의 성인남자가 중국에서 생산된 강도(剛刀)로 단숨에 그것을 절단할 때 1가닥을 절단하는 데 64찰나가 경과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2명의 남자가 5000가닥의 명주실을 붙잡았다고 하면, 강도에 의한 순간적인 절단으로 5000×64찰나의 시간이 경과하므로 1찰나가 얼마나 짧은지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수학적 설명에 따르면, 1주야는 30수유(須臾), 1수유는 30랍박(臘縛), 1랍박은 60달찰나, 1달찰나는 120찰나이다. 따라서 1주야를 24시간으로 해서 계산하면 1찰나는 1/75초가 된다.

불교철학에서 찰나는 물질적ㆍ정신적, 특히 정신적 현상의 순간적 생멸(生滅)을 설명할 때 쓰인다.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 한다. 즉 모든 존재가 찰나에 생멸을 계속하는 것을 찰나생멸이라 하며, 현재의 1찰나를 기준으로 앞의 찰나를 과거, 뒤의 찰나를 미래라고 하며 이를 합쳐 찰나 3세(世)라 한다.

ㅡ 참조, 네이버 백과사전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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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이해를 < 매우 쉽게 돕기 위하여> 생물학적인 실례를 들어본다. 보통 사람들은 위파사나의 달인이 아니고서야 불과 1/75초에 발생하는 찰나생, 찰나멸이라는 용어를 몸으로 체득해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행자 역시도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화두 수련하기도 바쁘니....)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호흡을 해야만 살 수가 있다. 그런데 호흡이란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마치 영화필름의 프레임처럼 끊어짐을 반복한다. 숨을 들이 마시고 - 끊어짐- 내뱉고 - 끊어짐 - 마시고 - 끊어짐- 내뱉고 - 끊어짐..... 의 사이클의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호흡 안에는 찰나생( 마시고 or 내뱉고)- 찰나멸(끊어짐)의 사이클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호흡을 죽을 때까지 하고 있으므로 찰나생멸이 계속 이루어진다.

찰나생이란 결국 어떠한 시간의 탄생이다. 찰나멸이 어떠한 시간의 끝과 멸망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찰나멸은 순간적인 끊어짐이며 이러한 끊어짐을 현미경적으로 계속 분해해 들어가면 결국에는 무와 진공의 세계로 귀결하기에 그러하다.

왜냐하면 호흡은 에너지의 운동이며 에너지의 운동은 언젠가는 멈추기 때문에 그러하다. 즉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자연계의 물리학적인 메카니즘이라는 말이다, 만약 이 이론이 쉽게 이해가 안 된다면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그 안에 머리를 박아 놓으면 호흡이 끊기는 것을 즉각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찰나생의 어떠한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며 찰나멸 후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이 없다. 찰나멸 후에 발생하는 무와 진공의 세계에는 물질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시간이란 공간 내의 현상의 변량이기에 오로지 물질로 이루어진 형체나 육신이 있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우리가 한 호흡을 3초 안에 들이 마신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차가 발생한다. 이미 들이마신 1초는 과거이며 지금 들이 마시고 있는 1초는 현재이며 앞으로 들이마실 1초는 미래이다. 그리고 3초의 들이 마심이 끊나면 찰나멸이 발생하며 호흡이 순간적으로 끊어지고, 무와 진공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숨을 내뱉는 과정이 발생한다.

숨을 내뱉는 과정 역시도 숨을 들이 마쉬는 과정과 비슷하다. 우리가 한 호흡을 3초 안에 내뱉는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차가 발생한다. 이미 내뱉는 1초는 과거이며 지금 내뱉고 있는 1초는 현재이며 앞으로 내뱉을 1초는 미래이다. 그리고 3초의 내뱉음이 끊나면 찰나멸이 발생하며 호흡이 순간적으로 끊어지고, 무와 진공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 마시는 과정이 발생한다.

즉 인간의 호흡의 사이클에는 시간의 탄생과 소멸이 같이 존재한다. 숨을 내뱉고( 찰나생, 과거, 현재, 미래의 탄생) - 숨의 끊어짐( 찰나멸, 무, 진공, 시간의 소멸) - 숨을 들이 마시고( 찰나생, 과거, 현재, 미래의 탄생) - 숨의 끊어짐( 찰나멸, 무, 진공, 시간의 소멸) - 다시 숨을 내뱉고..........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따라서 현재의 미래인 2017년은 하나의 기다란 두루마기처럼 쫙 펼쳐져서 과거, 현재, 미래가 고정되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프레임이나 인간의 호흡처럼 찰나생-찰나멸을 반복하며 펼쳐지므로 고정된 미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정된 미래는 호흡에서의 순간적인 끊어짐처럼 끊어져서 소멸하기에 그러하다. 만약 결정론의 주장처럼 고정된 미래가 굳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3초 안에 끝나고 마는 허무한 미래이다. 3초 후에는 호흡의 끊어짐으로 인한 무와 진공의 세계가 도래함으로 결정된 미래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3초 후에 찰나멸의 호흡의 끊어짐 이후에 새로운 호흡이 시작되며 새로운 시간이 탄생한다. 따라서 2100년의 미래는 현재 2016년의 시점에서 84년 후에나 발생하는 고정되어 결정된 미래가 아니라 마치 영화의 프레임처럼 인간의 호흡에 의해서 1분 내에도 몇 번이나 생성되고 멸망하는 미래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아무도 2100년의 미래를 정확하게 100%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2100년의 미래 역시도 고정되어 결정된 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2시간짜리인 한편의 영화가 172,800의 낱장의 필름을 풀로 길게 이어붙인 거대한 조립품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일생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3초의 한 호흡에 비유할 수 밖에는 없다.

영화가 2시간 후에나 끝나서 종영하듯이 인간의 일생도 3초 후에 끝나서 종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2시간 동안 계속 이어지지만 인간은 한 호흡 사이에는 계속 이어짐이 없고 찰나멸하며 끊어지기 때문이다. 한 호흡의 3초 후에 발생하는 호흡의 찰나적인 끊김 속에는 무한한 진공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무의 세계에서는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기에 과거, 현재,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정론은 여기서 파탄을 일으킨다,

3. 무, 진공, 제법무아

낱장으로 이루어진 몇 만 장의 필름들을 접착제로 길게 이어 붙이면 하나의 기다란 영화가 된다. 그러나 그 접착제의 틈을 찾아서 필름을 분해하면 더 이상 영사가 되지 않고서 화면은 깜깜하여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정의하는 제법무아의 세계이다. 무아이며 무상이므로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기에 과거, 현재, 미래 역시도 없다, 그러기에 결정된 미래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영화필름은 약 18만 장의 낱개의 필름들을 하나로 이어붙인 것이므로 시작에서 끝까지가 약 2시간가량의 영화가 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 매우 쉽게 예를 든다면) 생물학적으로는 한 호흡에 비유할 수 밖에는 없다.

인간의 한 호흡 사이에는 잠깐의 끊김이 있고, 이것을 현미경적으로 계속 분해하여 들어간다면 시작도 끝도 없는 깊고 거대한 심연인 제법무아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런데 한편의 영화는 2시간짜리 영화의 필름의 길이가 약 3천여 m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영화에서 제법무아의 세계를 발견하려면 그 필름을 중간에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든가 아니면 2시간짜리 영화가 다 끝나야만 제법무아에 해당하는 화면이 보이지 않는 단계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영화를 인생에 비유한다면 약 3초에 끝나는 한 호흡에나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4. 제법무아와 필름의 연결

영화의 길이는 2시간가량의 영화를 예로 든다면 약 18만여 장의 필름이 길게 하나로 구성되어 약 3300여 m의 길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호흡을 예로 든다면 한 호흡인 들이쉼과 내쉼 사이에는 찰나의 끊김인 찰나멸이 존재하고 이 찰나멸을 현미경적으로 세밀하게 분해해 들어가면 마침내는 무의 세계인 제법무아의 세계에 들어간다. 영화로 비유한다면 가위로 필름을 끊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다음의 호흡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제법무아>의 세계가 <색불이공-색즉시공-공불이색-공즉시색>의 4단계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을 수련 경험으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색불이공의 세계는 가위로 필름을 끊어서 화면이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로 비유할 수 있으며, 안의비설신의 6근과 12처, 18계가 모두 끊어지며 그 대상마저도 사라지는 초기불교의 3법인의 세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색즉시공의 세계는 색불이공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힘과 에너지를 내장하기 위하여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공간이 관념계에 펼쳐지는 단계이다.

공불이색은 공간에 비물질-에너지가 펼쳐지며 최소 입자인 극미가 공간을 꽉 채우는 단계이며,

공즉시색은 그 비물질-에너지가 물질 에너지화하여 현상계의 물질을 구성하여 우주 만물과 하나가 되는 단계이다.

따라서 한 호흡인 들이쉼과 내뱉음의 사이에는 찰나멸이 있으며, 그 찰나멸을 현미경적으로 분석하여 미분해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다 끊어져서 텅 비어있는 제법무아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지만 제법무아의 세계는 그 내부에 잠재하는 무형의 힘과 에너지에 의해서 다음 단계의 호흡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5. 초기조건( initial condition , 初期條件)

초기조건이란 물리량의 시간적 변화를 기술할 때에 시간 t = 0에서의 물리량의 값을 의미한다.

즉, 물체가 똑같은 중력하에서 운동하는 경우에도, 처음에 놓인 상태가 정지(靜止)인가, 비스듬히 던져졌는가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물체의 속도나 궤도 등 구체적인 운동이 달라진다.

그런데 운동 방정식 쪽은 가속도만을 포함하고 속도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어느 경우에나 동일하다.

그 때문에 운동 방정식을 풀어 물체의 속도나 위치 등을 구할 때는 물체가 처음에 놓인 상태, 즉 물체의 처음의 위치와 속도(초속도)를 조건으로서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초기조건이라 한다.
< 참조, 과학 백과 사전 >

왜 초기조건이 중요한가? 어제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과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같은가? 다른가? 의 의문에서 어제의 초기조건과 오늘의 초기조건이 서로 다르기에 어제의 미래인 2100년과 오늘의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다를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실례로 3초에 행해지는 한 호흡 내에서도 초기조건은 완전히 다르다. 즉, 3초간 ( 숨을 들이쉬고 - 찰나멸 이후 진공 - 3초간 숨을 내뱉고 - 찰나멸 이후 진공)의 한 호흡의 사이클에서 처음의 초기조건은 숨을 들이쉬고, 그다음의 초기조건은 숨을 내뱉는다. 한 마디로 초기조건이 정반대의 운동량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6. 시간의 동시성 이론.

< 동시성의 법칙에 의해서 동서남북의 공간이 한 번에 펼쳐지기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도 한 번에 펼쳐진다. 따라서 미래라는 시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라는 주장이 있다고 할 때에 과연 이 주장은 옳은 주장일까?

이미 앞에서 전술했듯이 우리가 한 호흡을 할 때에 숨을 들이 마쉬고, 잠깐 호흡이 끊기며 찰나멸하여 제법무아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찰나생하며 숨을 다시 내쉬게 된다. 그리고 잠깐 호흡이 끊기며 찰나멸하여 제법무아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찰나생하며 숨을 다시 들이 마시게 된다.

왜 한 호흡이 끊기며 제법무아의 상태로 되는가? 그것은 호흡은 입자의 운동으로 힘이며 에너지이기에 결국은 찰나생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적으로도 진공 내의 입자와 에너지는 진동과 파동을 하며 찰나생멸을 반복한다. 따라서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뱉는 동작 역시도 끝없는 찰나생멸을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호흡 사이에 존재하는 제법무아의 세계에는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성이 없기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도 없고, 결정된 미래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한 번에 펼쳐지려면 한 호흡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숨이 순간적으로 끊기는 찰나는 찰나멸 후의 제법무아의 상태이기에 시간성 역시도 찰나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7. 찰나생멸과 시간의 동시성

찰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에서 가장 작은 시간 단위로서 1/75초로 순식 간에 지나가는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1찰나의 매우 짧은 시간마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찰나생멸이 되풀이 됨으로써 모든 존재가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1/75초 사이의 찰나에는 찰나생멸과 시간성이 사라지는 무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하루 업무를 끝낸 자동차가 차고에 가서 정비를 받기 위해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하루 시작이 되어 출근할 때의 자동차는 찰나생이며, 퇴근해서 차고에 도착한 자동차는 찰나멸이며, 자동차가 차고에서 밤새 정지해 있는 것은 찰나멸 후의 무의 세계인 진공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호흡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은 찰나생, 숨을 다 들이마신 것은 찰나멸, 그 후에 숨이 잠깐 끊기는 것은 제법무아인 진공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찰나생멸은 이러한 찰나생멸과 제법무아의 진공이 약 1/75초 사이에 발생하는 것으로 1초에 75번의 찰나생멸과 진공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1초에 75번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그 시간성이 사라져 버리는 제법무아의 진공의 세계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동시성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은 1/75초 사이에 한 번 발생하고 제법무아의 진공에서 소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1초에 75번 발생하는 시간의 동시성은 앞에서 상술한데로 전부 다 초기조건이 다르므로 그 결과도 다를 것이므로 결정된 미래 역시도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결론이 발생한다.

즉 제법무아의 세계인 진공 전에 발생하는 1초 전의 초기조건과 또 진공 후에 발생하는 1초 후의 초기조건은 서로 다르기에 1초 전의 미래인 2100년과 1초 후의 미래인 2100년의 모습은 100%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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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성의 법칙과 시간의 동시성.

그러므로 시간의 동시성은 1/75초 사이에 1회 찰나생하여 발생하고, 그 후는 무의 세계인 진공 내에서 찰나멸 후에 소멸한다. 그 후에 또다시 찰나생하여 발생하는 시간은 앞의 시간과는 초기 조건이 다를 것이므로 미래 역시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찰나멸 후에 또다시 발생하는 찰나생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앞의 찰나생과 후의 찰나생은 초기조건이 다르기에 시간의 동시성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100년 후의 미래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100년 후의 미래가 존재한다면 무수하게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9. 동시성의 법칙에 의해서 생멸이 동시에 펼쳐진다.

동시성의 법칙은 찰나생멸을 동시에 펼친다. 따라서 지금 현재에 찰나생, 찰나멸과 제법무아가 동시에 펼쳐지기에 아무도 시간성을 예측할 수는 없다.

ㅡ 계속.
작성일:2016-02-29 22:26:30 58.143.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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