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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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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등록일
2014-01-16 00:19:18
조회수
4730
계족산 소고(鷄足山小考) 관동대학교 평생교육원 우리문화콘텐츠학 강사 최동순
  서-계족산은 동물의 발자국을 연상하며 닭발산이라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는 가축의 닭발과 전혀 무관하다는 의미로 설명을 하는 오해를 벗어나 계족산이라 명명된 몇가지의 사례들로 그 역사성을 찾아 보며 보통사람들의 역사발전에 일익되기를 기대한다.
  1. 한반도의 계족산
1) 순천 계족산 : 남쪽으로부터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6번지 일대의 계족산(682m)은 깃대봉(858.2m) 형제봉(861m) 매봉(867m)과 1300년 고찰이라는 정혜사를 가지고 있으며 3면계 서면 황전명 광양시의 봉강면을 접하여 순천 광양 여수를 조망 할 수 있는 명산이다.
 2) 구례 계족산 : 전남 구례군 구례 계족산은 오산의 둥주리봉(680m) 전망대에서 용서마을을 내려다 보는 낙조의 경관이 매봉과 어우러지는 구례의 명산이며 오산 사성암(四聖庵)과 도선(道詵)국사의 전설이 전하는 도선굴은 네분의 성인이 수행하던 수행처의 전설을 말하고 있으며 광대바위전망대(730)를 가운데 두고 간전면의 계족산(702m)는 섬진강을 따라 간척면과 계곡을 가지고 마주보는 산이다.
 3) 대전 계족산 : 대전은 예나 지금이나 풍수적으로 한반도의 가운데에서 교통의 요로이다.
대전의 계족산은 약 300m의 산성(423m)이 있으며 산성 정상에서 절골로 이르는 능선은 산디마을을 끼고 돌아간다. 앞산인 봉황산(453m)을 끼고 비례사 용화사 황룡사의 사찰을 따라 임천이란 유적지는 선사들이 은둔하였다는 전설을 전해주며 특히 이곳은 계족산을 백달산이라 부른다는 전설도 함께 가지고 있다.
 4) 영월 계족산 : 강원도 영월군 동면의 계족산(890m)은 초입의 왕검성을 따라 가래골의 골짜기를 끼고 발달하였다. 예부터 영월화력발전소와 함께 주변의 명산으로 조선조 정종임금의 태실이 있던 유적지이다.
  2. 강소성 계족산
 청나라 4대 성종(애신각라현엽) 강희 31년(1692년) ‘강소성고적각인사’에서 저자 范承勳으로 ‘鷄足山誌’ 上 下 두권을 “中國佛寺誌 叢刊”을 발간한다. 서문의 발간 년대는 1692년으로 되어 있으나 서문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고문서를 대대로 여러번 옮겨 쓴 모습이 확실하며 제일 처음 서문은 그 년대가 없으므로 언제부터 이 계족산지가 전래되는지는 분명히 알 수는 없다. 서문에는 500리 명산으로 적혀 있으나 그 내용은 동서가 100리씩이고 남북도 80리로 쓰고 있으니 그 둘레는 500리란 표현도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산수의 수려함은 하권에서 많은 예문(藝文)으로 말하고 있으나 경내에 있는 시설물은 그 시절의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말하여 주고 있다.
사원은 사찰의 철폐령이 거듭되며 승려들을 환속시키니 사찰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고 모두 실(室) 또는 처(處)로 말하며 중심도량도 보광전 명승도 사(寺)자 대신 전(殿)자를 쓰고 그 이외에는 모두 운하(雲霞)란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벽정실(壁靜室)-49處(절벽의 조용한 방)
임정실(林靜室)-55處(수풀속의 조용한 방)
애정실(崖靜室)-15處(벼랑에 붙은 조용한 방)
암원정실(巖院靜室)-52處(암자의 조용한 글방)
합산정실(合算靜室) 171 곳(處)
* 한 곳에 몇분의 선사들이 거처 한 것은 기록으로는 볼 수 없으나 많은 예문(藝文)에서 미루어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우며 강소성의 계족산에만이 아니라 사천성을 비롯하여 대륙의 전역을 비유 한다면 그 수를 혜아리기란 하늘의 별을 세는 형국이었으리라 비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생산되는 물산으로는 나무, 꽃, 과일, 새 짐승, 식품,들을 들 수 있으나 산속에 닭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새중에는 매와 꿩을 들고 있으나 계족산의 꿩이란 매봉에서 365일 매가 내려다 보고 있음을 말 할 때, 한 평생 매에 쫓기는 꿩 산을 계족산으로 말하는 것이다.
닭과 산을 함께 사용한것은 처음 부터 별다를 의미를 말하여 주고 있었었다.
또한 산을 설명하면서 계족산을 일명 九曲巖室이라 옛 서역 촉 땅에서 계족산을 범어로 굴굴질파타(屈屈叱播陀)로 말하였다고 하며 닭이란 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끝으로 계족산 8경을 들고 많은 선비들의 5언고시 7언고시와 율시들을 싣는것도 잊지 않았다.
즉 계족산이란 매에 쫓기는 꿩들이 위의 각 실과 처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모습을 표기한 것으로 사실사를 기피하는 벽암록 언어로 붙혀진 이름이었었다.
 
3. 범일선사의 변
 범일선사는 회창법란(845)을 당나라에서 맞는다. 조당집으로 읽으면 구사일생(九死一生-조당집 17권 범일조))으로 귀국 한 길을 보면 그곳은 강소성 계족산이었음은 분명하다고 비정 할 수 있다. 즉 삼국유사는 847년 귀국하며 백달산에서 사굴산문을 창업하였다고 쓰고 있는 백달산은 한반도 네곳의 계족산을 모두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즉 한반도의 계족산을 삼국유사도 사실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달밝은 흰산으로 통하여 백달산이란 은어로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4년이 지난 851년 명주도독 김공의 초청으로 명주로 입성하지만 그 4년동안의 입국 root를 다른 승려들의 입국 경로와 마찬가지로 강진만 또는 순천만으로 읽을 수 있으며 처음 순천의 계족산으로 은신한다. 그 기간 가까이 곡성 태안사에는 혜철화상(惠徹785-861)께서 동리산문을 개창하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가까운 곡성의 계족산을 거처 대전의 계족산과 영월의 계족산을 1년 씩 거치면서 가는곳 마다 사굴산문을 개창하고 851년에 명주(강릉) 땅으로 갔다는 길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범일화상의 직제자 행적(行寂832-916)의 비문 또는 고승전으로 읽으면 행적은 855년 동원경 복천사 관단(*)에서 윤법선사에게 구족계를 수구하고 바로 범일을 찾아가 수년동안 복응을 하다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859) (*)동원경 복천사 관단이란 현 강릉시 예국고성으로 당나라 불교는 당고조 이연은 철저한 도교인으로 당나라 불교는 관아에 불사와 도교사원과 함께 있었던 사기가 실사인것이나 그 이후부터는 동원경 복천사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다. 행적선사가 15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범일 스승을 다시 찾았지만 그 암자는 여러 곳으로 비정 될 뿐 어디라고 지정되는 곳은 아직도 숙제로 남는다. 설사 그 암자가 얻임을 알았다면 범일화상은 구순을 장수하며 자연사 할 수 없었거나 범일의 비탑과 부도탑이 이미 설치 되어 있었어야 할것이나 지금도 그 행적이 묘연 것을 명토이굴(明兎異窟)이라 표현한다. 다만 889년 범일의 임종을 행적 혼자 맞으며 손제자인 개청의 대에 민규 알찬의 시주로 비로소 보현사(普賢寺)를 개창하고 주석한다.(개청의 비문)
즉 889년 범일선사가 입적하고 910년 개청을 굴산에 있을 때 행적은 관승을 따라 서울(경주)로 떠난 후 보현사를 시주받은 대목은 범일의 암자가 어디임을 알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결 : 자고로 역사는 백성(중생-민중)을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왕조는 번창하며 승리하였고 그렇지 못한 왕조는 멸망하였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학에서도 꼭 같은 대답을 만날 수 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란 백성이 가장 소중한 세상이며 우리 조상들이 추구하던 정신인 것이다. 귀족의 왕도주의에서 매몰되어 계족산 운하에서 정진하던 구산선문의 역사를 바르게 찾지 못한다면 올바른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게 될것이다. 오느날 구산선문의 정신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의 지도자들의 하자(瑕疵)는 모두 백성(중생)들의 짐으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가 계족산을 모르고 계족산(구산선문) 정신의 역사를 모른다면 우리 조상이 정진하여 온 참 역사를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강릉신문-14.01.08일”
“강원일보 미디어판 독자칼럼”에서 원본을 볼 수 있습니다>
작성일:2014-01-16 00:19:18 220.70.21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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