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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진주 ... 여실지견

닉네임
moosim.park
등록일
2018-04-14 13:28:00
조회수
2823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숨어 있는 진주

스마트폰으로 인하여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글을 접할 수 있고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자료를 공유할 수 있다. 불교와 관련된 콘텐츠도 마찬가지이다. 검색 등을 통하여 양질의 콘텐츠를 접하였을 때 눈이 확 트여 지는 것 같다. 숨어 있는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소위 고수들이 있다. 현실에서는 만나기 힘들지만 사이버상에서 우연하게 만날 수도 있다. 올려진 글은 ‘공유’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공이 느껴지는 글을 접하였을 때 글을 읽는 맛이 난다. 그런 글은 몇 번이고 읽어 본다. 마치 음식을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듯이 내공이 느껴지는 고수들의 글을 읽어 보면 읽는 맛이 난다.

비록 댓글형식일지라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원음)에 근거하여, 그것도 실참수행의 경험이 녹아 들어간 글을 발견하면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하다. 스리랑카에 산다는 S불자와의 댓글 논쟁으로 알게 된 J님의 글이 그것이다.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사이버상에서 많이 배우고 있는 J님의 글 중에 S님이 올린 글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이 있다. 김나미박사가 불교평론에 올린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라는 글을 S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이에 대하여 J님은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처음에는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실체를 알고 나서부터 점차 비판으로 가더니 이제 잘못된 불교관에 대하여 따끔한 회초리를 드는 것 같다.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왜곡된 보살사상에 동조하는 실론섬님의 견해는...
크게 이야기하면, 정견이 바로 서지 않은 것이다......재가자의 수행을 왜 '가벼운 명상 정도로 하고’...란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실수행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수행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들은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말로만 '중도가 8정도라는 강력한 실천체계다'...라고 글쓰기 하면 무엇하는가?.......앙꼬 없는 찐빵같은 밋밋하고 공허한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 여기에 실론섬님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연꽃님도 들어와 볼 것이다. 그 외에 사람들도 가볍게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재가자 중에서 남모르게 수행에 습관이 붙은 사람들도 꽤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은 경전도 읽으면서 수행에 습관이 붙어서,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예전과 다르게 많이 변했다’...라는 이야기도 듣는다고 한다......
잘되면 고뜨라부.....성자의 호적에 올릴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의 구원처럼... 불교(붓다의 가르침)를 말씀의 종교로만 받아들이고 실수행을 등한시 한다면... 불교의 구원인 해탈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간단하다....
4성제의 깨달음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붓다는 위빠사나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삼명으로 깨달은 것이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4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진(멸진)통..누진(멸진)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번뇌의 소멸.......번뇌의 종식.......즉........완전한 행복...........
결국 닙바나..니르바나..열반에 도달했다...란 이야기다...........
연기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인과..연기를 아는 것만으로 붓다가 4성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인과..연기란 사성제를 깨닫기 위한 집성제라는 부분, 즉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라...갈애를 종식시켜라...........그러므로 윤회의 고리가 끊겨질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실수행에 있어서는 다 쉰소리일 뿐이다.

결국 실수행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도성제, 8정도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안전한 방법인... 8정도의 여덟 부분을 닦는 것이다.....
(J)
--

J님은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수행 없이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깨달음에 대하여 사성제의 깨달음이라 하였다. 사성제의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팔정도이고, 붓다는 팔정도를 닦음으로써 이루게 된 삼명三明(세 가지 밝은 지혜) 중의 궁극의 지혜인 ‘누진명’으로 깨달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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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살행과 실천불교

J님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S님은 자신만의 불교관을 제시한다. 그것은 대승보살행에 대한 것이다. S님은 초기불교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S님의 글을 보면 대승보살사상과 대승보살행을 대단히 강조한다. S님의 연이은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님의 말씀대로 붓다의 깨달음이 사성제입니다.
그런데 사성제보다 그 근본적인 깨달음이 그분을 정등각자로 이끌었습니다.
자설경(Udana)에는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법열을 만끽하며 7일 동안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연기"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성제도 결국 연기법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Udana에 보시면 보리수라는 소제목 하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초기불교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거론을 하였지만 "초기불교 = 참선과 또 다른 사띠 등의 수행법" 이라는 묘한 방법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붓다의 자비심이나 보살행을 배울 생각은 안하고 대승불교의 참선과 남방불교의 또 다른 사띠 등의 수행법을 배우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초기불교 불자로 자처하는 분들치고 연기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연기법이란 실생활에서는 실천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대답은 우리들은 연기적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존재, 독자(독립)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요?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요?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 점에서 근자에 한국에서의 초기불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연기법의 실천행은 간데도 없고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S)

초기불교란 자비심과 보살행입니다. 실천불교입니다. 개인의 마음 닦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중국의 마조스님은 제자들이 마음 닦는다고 앉아있을 때마다 그 옆에서 기왓장을 들고 와서 갈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왓장을 갈아봤자 거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여러 수행법 중에서 그 어떤 깨달음보다도 가장 큰 깨달음을 가져오는 수행법이 "자비행 수행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닦아서가 아니라 자비행의 실천으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띠 사마타 위파사나 모두 다 좋은 수행법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강조한다면 대승불교의 화두 참구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요? 집착을 버리는 것이 불교인데 사띠니 하면서 집착하거나 화두에 집착하거나 50보 100보 아닌가요?

혼자 앉아서 명상하는 것도 좋지만, 불우시설에 가서 봉사활동하는 것도 마음을 한결 행복하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팔정도가 수행법입니다. 그럼 그런 팔정도란 무엇 무엇이 있는가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올려놓았습니다. 무엇이 팔정도의 여덟 덕목인지 하나하나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올바른 생활(정명)도 팔정도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팔정도는 수행승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팔정도는 중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진리입니다.
(S)

연달아 실려 있는 S님의 글을 보면 보살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부정하는 듯한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재가자들이 앉아서 수행하는 것보다 불우시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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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

S님(실론섬님)의 불교관은 진정한 초기불교는 대승보살사상에 입각한 자비 보살행의 생활불교라고 주장하는 독특한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다음과 같이 장문으로 답한다.

--
실론섬님의 글을 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 아니다..... 말로는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체계다’라고 하지만, 8정도 수행을 실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을 읽었다면서도.... 왜곡된 보살사상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정견에서부터 헤매고 있다.......
누군가가 이론과 지식만으로 붓다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불교에 관심 있던 아인슈타인이 단지 물리학자로만 남았을까? 우스갯소리라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8정도 수행은 아는 것처럼, 정견으로부터 시작한다.....
정견이란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전을 듣고 읽고, 선우 도반들과 법담을 나누고.........그러한 방법이 다 정견을 갖추려는 시도이다......

정견에서...4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이해)에서..... 바른 사유, 즉 올바르게 생각하게 된다...........

8정도를 계,정,혜의 3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8정도의 순서를 보면, 혜(정견.정사유)..계(정어.정업.정명)..정(정정진.정념.정정)으로 되어있다.
8정도의 혜는 붓다의 깨달음의 지혜에 속하지만, 바른 견해의 범위는 작은 지혜일뿐이다...즉,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은 4성제를 깨달은 지혜와 동급이 아니란 소리다....
초보불자들은 이 8정도의 정견.정사유가 혜학이라고 해서..... 이것을 헛갈려한다.

8정도의 수행은 정견으로 시작해서..............정정으로 끝난다.........
올바른 8정도 수행의 완성은 정정으로 끝난다........

예전에 실수행을 많이 했음을 짐작하게 하던 분이었는데, ‘선정을 갖추면, 정견.정사유로 혜학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는 글들을 봤다..... 8정도의 정학과 혜학에 대해서, 8정도의 혜학..즉 정견과 정사유를 완벽한 지혜와 약간은 혼동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지켜봤다.

이 분은 현생에 일단 수다원 획득이 목표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수행을 더 한 이후에, 남방에 가서 비쿠가 되겠다...라는 글과 남방이면 어디를 가겠다...하는 구체적인 글들을 멀리서 지켜봤다.....
선업을 많이 쌓은 분처럼 느껴지니, 그의 선업에 의해서 선택되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분 같았는데 참 대단한 분이었다.... 멀리서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그의 삶의 여정에서 원하던 바 그 이상을 얻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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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라는 소리는 쉰소리에 쉰밥이다.

대승은 붓다를 가볍게 본다..아라한들을 가볍게 본다....
가소로운 짓을 하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악업을 쌓는 것도 모르면서...
보살행이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보살 수행으로 보살이 되어라...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어버릴 수 있는 계기를 가질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세세생생 윤회 속에서 보살도 행하라...라고 부추기면서.............
붓다가 가르친 8정도 수행도 안 하는 자들이.... 자신이 보살, 보디사트바라고 헛소리 하면서 악업을 짓는다............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 조차도 강요하면서.....
불.법.승...삼보 자체를 다 부정하는 훼불.훼법.훼승 하는 것을 옹호하는 실론섬님의 경안이란 것이..... 실수행 없는 사상누각의 이론과 교리에 함몰되어버린 자들의 헛소리 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보살이 아픈 것은 갈애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애의 소멸은 고사하고... 감각적 욕망 속에 허우적대는 윤회 속의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주 웃긴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한다.
아라한은 고사하고..... 수다원 성자..... 아니 작은 수다원조차도 되지 못한 자들이 아라한 위에 십지 보살을 만들어놓고..... 모래 탑을 짓는 어리석은 짓을 부추기고 강요하는 격이다.
(J)
--

글을 쓴지 여러 해 되었다.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작성해 놓은 글을 보면 얼마나 경전에 충실한 것인지 알 수 있다. J님의 글을 보면 초기경전(붓다의 원음)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경험이 적은 자들을 위하여 체계적으로 수행방법을 알려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수행 지도를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몰랐던 사항이나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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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표현

J님의 반박문에 대하여 S님은 자신의 불교관에 대하여 다시 정리하여 설명한다. 이는 다름 아닌 생활불교에 대한 것이다. S님이 생각하는 생활불교는 어떤 것일 것일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대승불교에 대한 글을 쓰는 의도를 굉장히 왜곡하시는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글의 내용이 제가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승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만 초기불교를 대승(큰 탈것)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 불교의 한 줄기인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초기불교)와 비교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게 아닙니다. 님처럼 생각한다면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법담을 나눌 부분이 없는 듯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붓다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것은 "연기" 입니다. 그건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연기법을 이야기했고 팔정도를 이야기했고 자비와 보살행을 이야기했으며 그리고 관념불교가 아니라 인과법에 충실한 실천불교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저는 머리 깎고 출가한 수행승도 아니고 전문학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님이 말하는 몸과 마음만 들여다보는 그런 사띠수행이라면 하지 않습니다. 그건 대승불교의 화두참선이나 오십보 백보이니까요. 대신에 저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가능하면 "죽일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사기꾼.." 소리를 죽을 때 듣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그게 수행이라면 저도 수행을 하는 것이겠지요.

근본불교 = 자비와 보살행입니다. 45년 붓다의 생애가 그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자비와 보살행인가? 우리들은 연기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비심을 마음속에서만 낸다고 행으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입니다. 자비나 보살행은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 그리고 부단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팔정도 수행의 일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띠 수행보다 천배 만배 어려운 수행입니다.

또한 님에게는 아라한이 왜 대승불교인들에게 폄훼되고 보살상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자 열린 마인드가 아니라서 님의 번뇌만 늘어날 것 같습니다. 힌두교가 바다를 보고 바다라고하면 외설이고, 불교가 바다를 보고 바다라고하면 진리는 아닙니다. 그냥 바다는 바다라는 진리일 뿐입니다. 누가 말을 하든 간에...

각자 생각하는 대로 불교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니까요.
(S)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표현을 하면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말이나 글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누군가 자신의 견해를 자신만의 표현법을 사용하여 말하였을 때 그 표현방법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말을 잘 하지 못해 단답형으로 말하거나, 글을 잘 쓰지 못하여 단답형으로 글을 썼을 경우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는 자에 대하여 ‘도인’ 아니면 ‘돌인’이라 하였다. 도인에게는 침묵이 ‘금’일수 있지만, 표현하는데 한계를 갖는 이가 침묵한다면 그 침묵은 금이 아니라 ‘똥’이라 하는 것이다.

말이나 글로 표현된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S님의 글을 보면 연기, 깨달음 등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보살행, 현실행복론, 생활불교론으로 귀결된다. 더구나 “근본불교 = 자비와 보살행입니다”라 한다. 이런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경전(붓다의 말씀)을 폭넓고 깊게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초기경전(붓다의 원음)에 대하여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문제라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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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S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J님은 어떻게 반론하였을까? 매우 쉽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때로는 재미나게 표현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위에 이야기도 다 쉰소리일 뿐이다.....찬밥도 아니고, 먹을 수 없는, 먹으면 병에 걸리는 쉰밥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붓다의 8정도 수행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결국 8정도를 닦는 수행을 실수행으로 좁혀 가면... 사띠와 사마디가 남는다.

남방에서 수행의 부류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마디를 약하게 하고 사띠를 강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사마디를 강조해서 자나jhana..색계 사마디(삼매), 즉 선정에 들어가는 것...그렇게 선정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더욱 강력해진 사띠로 관찰하는 것.

참고로... 북방(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수행의 부류가 크게 한 가지가 있다.....사마디(삼매)만을 강조하는 것...즉 색계 삼매인 자나(선나..선禪;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또는 변질된 자나(선 or 젠Zen; 선정)인 화두선이나 간화선을 참선 또는 참구(?)하는 것.

사띠의 고요한 집중은 선정에 들어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극도로 고요히 집중된 사띠는... 몸과 마음, 몸과 마음의 작용, 그리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통찰(깊이 관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래서 사마디를 약하게 하고 사띠를 강조하는 수행으로는.... 붓다가 이룬 정각(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는... 상수멸(멸진 또는 누진)... 실상과 진리를 여실히(있는 그대로) 깨닫고, 사성제 전체를 완전히 깨닫는 삼명三明(세 가지 밝은 지혜).....이런 것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하다.

사마디를 약하게 하고 사띠로 관찰하는 것을 강조하는 수행이.....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말하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이다.....찰나삼매(또는 근접삼매), 찰나사마디를 이용한다는 위빠사나 수행.......

이 방법이든, 저 방법이든.... 결국 다 사띠가 중요한 것이다.......
사띠는 불법佛法(붓다의 가르침) 수행..8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기초이자 토대다.

재가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하는 것에 즐거움..기쁨과 행복감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해야 한다. 어떻게 사띠를 하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조금이라도 더 사띠를 할 수 있을까?...하는 연구를 해봐야 한다..... 사띠하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습관을 들이는 방법을... 심도 있게 연구해봐야 한다.

사띠란 결국 지켜보기다........
무엇을 지켜보는가?.....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어떻게 지켜봐야 하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행동, 말, 생각 등을... 영화를 보듯이 다른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지켜봐야 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사람은 자기 자신을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할 수 있다........사람의 이런 능력(?)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파괴하는 자살(자신을 살해함)로 이끌 수도 있고.....자기 자신을 해탈(자신으로부터 벗어남, 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남)로 이끌 수도 있다.

붓다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몸과 마음의 작용.....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신체감각(오감각; 물질감각)과 정신감각(생각, 기억, 감정 등)을..... 객관적으로 사띠함(마음챙겨 알아차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번뇌와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고...정각(해탈,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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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란...결국... 자기 자신을 행위자와 관찰자로 나누어서 지켜보는 것이다.....

🌳'행위자를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이다'........
행위자의 행동身, 말口, 의도意... 감각, 생각, 감정을......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이다........
행위하는 것은 다 오온이다..........단지 나는 지켜보는 자로 만족하자.

행동, 말, 의도, 감각, 생각, 감정은 다 오온의 작용이다.........
관찰자 역시 오온에 속하지만, 일단은 순수한(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善한; 쿠살라善한,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이라고 해두자........

일상에서의 사띠가 발전되면..... 좌선과 행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행위자를 지켜보게 해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행위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점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보는 자가 행위하는 자에 함몰되면..... 영화 속 주인공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지 않고... 영화 속 주인공에 함몰되어 같이 눈물 흘리며 울고 웃고 성내게 된다.......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놓쳤군...행위자에 함몰되었군...하면서 다시 처음의 그 위치에 다시 관찰자를 둔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신구의身口意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관찰자가 서서히 분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관찰자를..... 행위자인 몸과 마음, 오온에서 분리해놓고 본다.......그러다가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면... 관찰하는 것을 망각하고 같이 아프고 슬프고 웃고 성내고 그런다........
그럴 때 ‘놓아버리기’를 하는 것이다..... 난 관찰자이지 행위자가 아닌데, 내가 아플 필요가 무엇인가?... 행위자가 아픈 것이지, 관찰자인 내가 아픈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작은 지혜가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집성제의 실천인 ‘놓아버리기’....... 즉, 몸과 마음의 감각(물질감각과 정신감각)에 대한 갈망과 혐오의 갈애...그러한 갈애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라는 집성제 실천의 초기단계다.....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난 관찰자이다, 관찰하는 내가 아플 이유가 없다.
행위자가 아픈 것이다........행위자가 아픈데, 관찰자가 같이 따라가서 아픈 것은 멍청한 짓이다........이런 작은 지혜가 수행의 체험으로 생기게 되면서, 관찰자가 행위자로부터 자연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놓아버리기..방하착의 연습이고.....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사성제 중의 집성제의 실천...갈애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라는 실천이다..... 그것이 갈애의 연기를 끊고 소멸시켜 가는 초기단계의 과정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미세한 자아식, 에고식은 아라한에 가서 완전히 끊어진다..... 아나함에서는 감각적 욕망은 사라졌지만, 미세한(무의식적인) 자아식, 에고식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미세한 우월의식인 아만, 존재하려는 무의식적인 미세한 욕구 등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행위자....이놈의 행동, 말, 생각 등을 관찰자가 지켜보는 것에서.......특별한 노력 없이도 관찰자가 분리되어 행위자를 지켜보게 될 때, 때로는 아무 의도 없이 행동하고 있는 자기를 빤히 지켜보는 자가 있다고 느껴질 때...........사띠가 강력해지는 것이다........

아직 다 소멸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습관의 경향성(業)은... 관찰자가 행위자에 무의식적으로 함몰되어 우비고뇌하면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무의식적으로 행위자에 끌려가게 만든다......
그렇지만 꾸준한 지켜보기 연습, 훈련, 수련, 수행을 통해서... 이 관찰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작은 지혜의 싹이 트게 된다.
아직 원하는 궁극의 지혜는 아니지만..... 작은 지혜가 관찰자에게서 싹이 터서... 행위자에게 함몰되는 관찰자를 제어하게 된다.........
이것이 사띠sati(마음챙겨 알아차림)와 삼빠자냐sampajañña(지혜/빤냐로 알아차림/앎)는 결국 함께 간다...라는 의미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띠의 연습, 훈련, 수련, 수행은 매우 중요하다..... 하면 한만큼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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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구체적인 행선이나 좌선으로 연결시켜 본다.

좌선을 한다......
자신을 지켜본다.......난 관찰자.................다리에 통증이 생긴다...아프다.
아픈 것은 행위자..........
관찰자가 행위자에 함몰되면 아픈 다리를 풀게 한다.......
그러나 작은 지혜가 생겨서.......아픈 것은 몸과 마음, 즉 오온이지, 즉 행위하는 놈들이지... 관찰자가 아픈 것은 아니지 않은가?...하는 지혜의 일어남으로 다리 푸는 것을 막게 한다.......

이러한 것이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구별되는... 수행으로서 얻은 지혜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들의 정신(마음)은 수.상.행.식 무더기(온)로 이루어져 있다.........문제를 일으키는 마음은 거의다가 행온이다.....즉 움직이게 하는 것들은 거의다가 행온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오개다..다섯 가지 장애...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

사띠의 일차 목적은 고요함이다.........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행위자와 관찰자가 분리되어야 한다.
관찰자가 행위자에게 함몰되어...몸이나 마음이나 움직이려는 충동이 생길 때.....
이것을 멈추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작은 지혜다..........

즉 사띠와 삼빠자나는 같이 간다......

몸이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인...다섯 가지 장애(오개)는... 다 행위자인 것이다.........
관찰자가 지켜보면서.....움직임이 멈춰지고..... 대표적인 다섯 가지 행위자인 오개가 사라질 때 선정에 드는 것이다.................움직이게 하는 요소들, 즉 행위자는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때 행위자는 없다............오직 관찰자만 있다...........
의도(또는 의지; 위딱까-위짜라)가 2선정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초선정에서 관찰자...사띠의 대상은 지복(삐띠와 수카)이다.......................나중에 4선정에서 평정(우빽카)으로 연결된다........ 이것의 완성이 8정도의 정정正定(바른 삼매).....정정正定 중에서 색계 삼매인 자나(선나..선禪; 선정禪定)의 완성이다.

마음을 속일 순 없다.....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결코 선정에 들어갈 수 없다.....
설사 스킬로 선정에 들어가더라도, 금방 튕겨 나온다.
이것이 마음의 본질적인 힘이다...........
마음을 자신이 속일 수 없다..........

색계 삼매의 완성인 4선정에 이르렀을 때..... 마음의 힘...고요하게 집중된 사띠의 힘이 매우 강력하게 된다.......... 이것이 8정도의 정견과 정사유를 더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해준다.

그러다가 최종목적지...상수멸(멸진 또는 누진)...에서는............마지막 붙잡고 있는 관찰자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그것을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다..머리로는,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고 하고... 체험한다고 한다........

결국 마음이 족쇄에서 풀려난다.....마음이 집착하지 않는다.....마음에서 번뇌가 사라진다.......탐진치나 갈애가 생길 건덕지조차 없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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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어 보면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띠란 결국 지켜보기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늘 듣는 말이 있다. 그런데 행위자와 관찰자로 나누어 지켜보는 것이라 하였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마음이 몸과 마음을 보는 수행이라 하였는데 위 글에서는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그래서 마치 수행 지침서처럼 보인다. 이런 내용은 인터넷은 물론 수행처에서도 접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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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님의 이어지는 글을 보면 S님에 대한 실망을 엿볼 수 있다. 일련의 게시물을 죽 지켜보았을 때, 처음에는 S님에 대하여 경안이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새로운 글이 올라올수록 견해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안이 없음으로 결론이 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매우 긴 글이지만 연속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글에서 알 수 있다.

1) 아라한을 부정하고 참칭하고 모독하는 자들

연기를 통해서 안 것이지, 연기만을 깨달았다고 해서 사성제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소리 역시 실수행에서 쉰소리이고 쉰밥이다....

결국 실수행은, 특히 재가자의 실수행은... 우선, 행위자와 관찰자를 분리해서 사띠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행위자가 아픈 것이지, 관찰자인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
행위자에 함몰되지 않고 사띠가 지속되면........ 행위자에게 통증이 일어나고...지속되고...사라지고........행위자에게 감각, 생각, 감정이 일어나고...지속되고...사라지고...........를 알아차리게 된다................
행위자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깊은 사띠가 지속되면........ 행위자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고....사라지고....붕괴되고.........를 알아차리게 된다................이것이 무상에 대한 지견이 지혜로서 생기는 초기 단계의 과정인 것이다.

자, 다리에 통증이 일어난다.....'내가' 아프다...'내' 다리가 아프다......이것이 자아의식, 에고의식이다...
나라고 여겨지는 다리가 아픈 것이지, 관찰자가 아플 이유가 없다........
이 관찰자가 행위자인 아픈 다리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지켜보면..... 그 행위자 역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된다.......이러면서 행위자에 대해서 집착함을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8정도 수행에서..... 4성제 중의 하나인 집성제 실천의 시작인 것이다........집착을 버려라.......놓아버려라...........방하착 해라............

이러한 것들 역시 자기가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다 공염불이고, 다 쉰소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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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것이 관찰자가 아니고, 오온이라는 행위자일 뿐인데.........
결국 지켜보기를 통해서 행위자 자체도 일어나고...사라지고... 사라지는데.....
관찰자 역시 나중에 사라지게 되는데........아픔이 어디 있는가?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라는 보살...........
아프다라는 보살은 행위자가 아픈 거냐?... 관찰자가 아픈 거냐?

중생이 아픈 것은 중생이란 행위자가 아픈 거냐?... 중생이란 관찰자가 아픈 거냐?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정한 보디사트바(보살, 보리살타, Bodhisatta;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는 뜻)..... 가짜 보살이 아닌, 진짜 보살(깨달음을 구하는 자)이었던 고타마 싯달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어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붓다(부처; 깨달은 자)가 되신 후에 하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감각, 생각, 감정을 '나'다, '나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느냐?"

"수행자들이여,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오온('색수상행식' 작용 무더기)을 '나'다, '나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느냐?"

"수행자들이여,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몸(물질작용 무더기)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을 '나'다, '나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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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으로 남을 도와줄 때도 조심해야 한다.....
예컨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사줄 수 있고, 돈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런 것에 길들여지게 되어, 생계에 대한 일을 등한시하고 나태함이 몸에 배이게 되면... 자비심으로 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악업(아쿠살라 깜마;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잠재의식적인 습관..업)을 짓게 유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비慈悲(사랑 자慈 + 슬플 비悲)는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 '멧따-까루나'를 한문(중국어)으로 번역한 것이다. 자비(멧따-까루나)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이타적인 지혜로운 바른 사랑'...줄여서, '지혜로운 바른 사랑'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붓다가 가르친 자비(멧따-까루나)가 아니다.....
자비가 없는 지혜 또한 붓다가 가르친 지혜(빤냐; 반야般若는 빤냐의 한문 음사)가 아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른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유다.
붓다가 강조했듯이... 8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지혜와 자비'가 함께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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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계를 지키겠다고 서원한다(맹세하며 원을 세운다).......
그런데 하나를 어겼다. 마음이 괴롭다. 집착함 때문에 괴롭다.....
나는 안돼...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면.....이것이 자신에 대한 악의다.
마음 역시도 조건생 조건멸이다.....................
사띠함을 놓쳐서 그랬으니 괴로운 마음도 순간인 것이다. 놓아버리고 다시 새로운 선善한(쿠살라한;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자비희사 사무량심 중에서...........
자애(멧따) 수행은 선천적으로 자애심,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한테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인들한테는 이것이 어렵다......
자애 수행의 기본은 자신에 대한 악의를 없애는 자애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한 악의가 생각 외로 거의 다... 깊이 박혀있다.......

그런데 사띠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 상태에서 자애 수행을 하면... 자애 수행이 쉽게, 강력하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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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
그 보살은 어디가 아픈가?........

관찰자가 아픈가? 행위자가 아픈가?......
관찰이나 하고는 있는가?.
관찰자의 분리는 고사하고, 행위자에 함몰되어 아플 것이다..........

이런 자들이 아라한의 권위를 부정하고 참칭하고 모독한다.........
결국 불.법.승.......삼보를 다 부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회교도인 자...특히 수피가..... 불교수행(8정도 수행)을 배우면서 회교도를 버리고 불교도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실수행 없는 지혜는 지식일 뿐이다.
재가자의 실수행..또는 명상수행은..... 일상생활에서의 사띠 수행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긴 글 적었는데..........
더 이상 여기에 적을 일이 없을 듯 하네요.......
굿럭.........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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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완전한 착각이었네요

글들을 이어적다가 님의 글을 늦게 읽었습니다. 더 해봐야 쓸데없는 이야기 같지만, 더 할 말도 없고 해서 한자 더 적어봅니다.

붓다가 본 연기와 님이 본 연기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님이 연기를 잘 알아서 현실 속에서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데, 왜 깨달음에는 근접하지 못하는지요?...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의 깨달음입니다..... 연기는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요...그러니 집성제로서 한 기둥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성제는 갈애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도성제는 8정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고....그래서 8정도를 닦는 수행을 통해서 얻은 연기로 사성제를 깨달은 것입니다..... 님이 생각하는 그런 연기로 사성제의 깨달음에 근접할 수가 없습니다.

님이 연기라는 지식을 무기로 현실 생활 속에서 하는 자비행은..... 기독교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원 받으세요’...라는 식으로 충분히 넘치게 잘 하고 있습니다..

님은 몸과 마음만 보는 사띠 수행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체계다’...라는 님의 말에서 내가 오해를 한듯합니다..... 님이 수행도 하면서 경전공부도 하셨으니 저런 말을 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네요...^^

중도가 8정도의 강력한 실천체계이지, 사상이 아니다...라는 말은 립써비스용이었나 보네요.........

내 글에서 쉰밥, 쉰소리라고 굳이 과격하게 말한 것은... 구체적인 실수행에 들어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입니다........

당연히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 사띠 수행을... 하든지, 안 하든지는 님의 취사선택입니다만.....
'조주는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라는 쓸데없는 화두를 대상으로 참구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 붓다가 말씀하신 '몸과 마음, 즉 오온..... 궁극의 정신과 물질을 여실지견'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연기를 이야기한다면..... 몸과 마음..정신과 물질, 명색에 대해서 수행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님은 연기의 인과를 이야기하는데, 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붓다가 말씀하신 연기의 인과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붓다가 왜 연기를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현실 속에서 열심히 보살 수행하라고..... 붓다가 연기를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무명으로부터 비롯되는 연기를 말씀하시면서.....존재의 족쇄를 채우는 감옥의 철장을 부수라고.....붓다가 연기를 말씀하신 겁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연기와 연기의 인과는..... 님이 생각하는 그런 작은 의미의 연기와 연기의 인과가 아닙니다.......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의 깨달음이라고.......
무명은 사성제를 깨달지 못하는 것이 무명입니다........
결국 무명에 대한 연기의 인과는... 세세생생 보살도 행한다고 하면서 윤회하게 하는 겁니다...지옥도 가보고, 4악처에도 가보고............단지 현생에서 지금은 인간이라고 보살도 행한다고 하는 겁니다.
붓다는 보살도 행한다고 해서...보살 수행 한다고 해서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 안했습니다.............

8정도 수행에서..... 님이 제기한 것처럼 정어, 정업, 정명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님과 나는 정어, 정업, 정명 부분을 보는 데에 있어서 서로 관점이 틀리지만요.......

님 말대로... 경전은 스님들 위주로 된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붓다는 재가자가 아닙니다......출가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정도에 정어 정업 정명을 포함한 것은..... 재가자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출가자의 계목이 227계인데.....227계는 고사하고 5계만 잘 지킨다면....... 뭔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삶, 생활, 생계, 직업)이 필요하겠습니까?..........
붓다의 예리함과 사려 깊음을 깊이 생각 안 해 보셨네요.......

8정도의 계학...정어 정업 정명을 보면..... 재가자들도 8정도 수행을 하라는...붓다의 사려 깊은 배려가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님이 중요시 여기는 보살, 보디사트파에 대해 잘 아시면서..... 님은 희안한 이야기를 합니다..... 초기불교 배우신 분이 결국에 가서는 대승의 힌두논사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격입니다.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이런 내용은 다신교든 유일신교든...신을 믿는 종교에는 없습니까?.....
님이 중생 속에서 서로 얽혀서 남도 나도 다 얽혀 있다...라는 것은 인드라망 이야기입니다.... 연기와 연기의 유사품인 인드라망을 혼동하지 마세요..... 인드라망 이야기 역시 힌두논사들의 이야기입니다...최고의 신 브라만의 지배하에서 남도 나도 수많은 아트만들도 수많은 하위 신들도 다 같이 얽혀 있다는 힌두사상의 인드라망은....... 붓다가 말씀한 진정한 연기, 인과가 아닙니다.

출가승을 왜 존경해야 하는지 아십니까?.....연기, 인과에서 남들보다 더 절박하게 윤회의 위험성을 보기에... 오욕락을 버리고 출가해서..... 그 얻은 도를 타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무늬만 출가승도 많지만요.....

님은 연기의 인과로 반복되는 윤회의 위험성을 절박하게 보지도 못하시는 분이..... 연기의 인과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현실생활에서 열심히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게 최선이라고...윤회의 위험성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시는 목사님처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8정도의 실수행의 기초가 되는 몸과 마음을 사띠하는 수행도 안한다고 하고요.
붓다가 가르친 8정도 수행을 부정하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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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님이 현실에서 생활 할 때조차도..... 사띠가 부족하면, 결국 탐진치의 극단으로 갑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참지 못해서 성추행, 성폭행을 저지르고...분노를 참지 못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겁니다.....요새 그런 사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행 없이... 경전 상으로만, 지식(교학)으로만 8정도를 공부한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건으로 성추행, 성폭력...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개연성은.....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띠 수행을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님의 선택사항이지, 내가 강요할 것이 아니지만요.

지식으로 만든 논리, 지식을 꾸역꾸역 우겨 넣은...뇌의 지식적인(의식적인) 작용을....... 실수행의 지속적인 반복 수행이라는 정신적 훈련으로 얻은 경험적인(습관화된, 무의식적인) 지혜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실수행으로 얻은 경험적인 지혜의 힘은... 현실생활에서도 당연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구요.

님은 정어 정업 정사유만 한다고 하니..... 결국 님은 정념(바른 사띠)도 정정진도 정정(바른 사마디)도 안하고...결국 8정도의 시작점인 교학차원의 정견 정사유도...왜곡된 보살도에 대한 현실생활 범주에만 만족하는 듯한데..... ‘8정도가 중도의 강력한 실천체계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라고 느껴집니다.

난 물론 님이 연꽃님보다 수준이 높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띠 수행을 골방에서 화두 수행만 하는 자들에 비교해서 그런 사띠 수행은 안하겠다고 하니.....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님이 주장하는 그 희안한 연기,인과 논리로 열심히 보살도를 행하며 열심히 현실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고..... 몸과 마음을 사띠하는 수행이라면 안 하겠다는 말은... 붓다가 말씀하신 연기와 연기의 인과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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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십보 백보

님의 말대로, 또 위와 같은 학자들의 견해대로에 의하면.....
붓다는 삼명 중.....숙명명, 천안명에서.......깨달았어야 하는 겁니다.........
숙명명에서 업을.......
천안명에서 연기를...........
누진명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붓다는 삼명 중 마지막 누진명으로......사성제를 완전히 깨달은 것입니다.......
붓다는 누진명에서 사성제 전체를 완전히 꿰뚫어 본 것입니다.........
물론 천안명.....다른 말로 집성제의 연기,인과가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요.......
붓다가 연기로 깨달았다하면, 천안명에서 끝났어야 합니다.....
그 이후 반조에 들어갔겠지요.
누진명으로 사성제를 전체적으로 완전히 깨닫고 반조에 들어간 것입니다.......
경전을 자세하고 깊이 읽어 보고, 법다운 생각을 해보세요.......

누진명.....즉, 사성제의 깨달음 이후..... 여러 날들을 지복 속에서 좌선, 경행 등을 하며 반조합니다......... 그 지복이 소위 말하는 열반락이라는 겁니다.....고통의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 완전한 행복...........
이러한 지고의 행복, 완전한 행복은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들이면 다 같이 느끼는 겁니다............

부파불교에서... 아라한들이 깨달음 이후 죽을 날만 기다렸다는 대승힌두논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아라한이 있었다면... 대승힌두논사들은 그런 아라한의 이름을 정확히 자신이 편찬한 위작 경전에다 기술했을 것입니다.....
아라한을 공격하기 위한 주 타켓을 삼기 위해서라도.........

님이 알고 있는, 죽을 날만 기다리던 아라한들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 기껏 남방불교에서...교학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초기불교 공부하셨다는 실론섬님이...두논사들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사람에게는 잔영 의식이란게 있습니다.....그림자 의식이지요.......
대승에서 어떤 출가승이 있다고 합시다.......그 분이 다시 발심해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러 갔다고 칩시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기존에 한국에서 누렸던 출가승이란 지위의 혜택을 보고... 초기불교 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위치를 기존 종단에서 만들어 가고.......
이분의 마음이 지향하는 곳은... 초기불교승입니까?...아님 기존의 대승종단승입니까?.......
이 분의 마음은 대승종단 쪽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계율을 보면 압니다.........
결국 기존의 현실을 택한 것이지요.......
오늘날 대승종단에서도 필요로 하는... 초기불교를 공부했다는 희소가치가 있으니.......

아쉽게도 이런 분은 숙명통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생을 봤다면, 기존의 현실을 택하지 않지요.
아예 남방불교 비쿠가 되서, 한국에 다시 안 돌아오겠지요.......
윤회의 절박함을 직접 자기가 봤으니까........

그런데 한국에는 출가한 중이 아니라 가출한 중들이 참 많습니다........
출가승이 아니고, 가출승이 태반입니다.
가출승이 태반인 한국에서... 그래도 다시 발심해서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초기불교를 공부하러간 스님은 그래도 순수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마 절박하게 윤회의 위험성을 못 느끼셨을 테니까... 기존의 현실로 다시 돌아와 기존 종단의 계율로... 기존 종단의 승복을 입고... 주어진 곳에서 맡은 바 나름대로 순수하게 스님생활을 한다고 하지요.......
이런 분들은 거의다가 수행승이기 보다는 교학승들이 많습니다..........
기존 대승불교의 그림자 의식이... 초기불교를 공부하러 갔다고 해도 쉽게 벗겨지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에고식, 자아식보다야 약하겠지만....

그래서 계율을 보는 겁니다.....
엄격한 계율을 출가자는 지켜야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초기불교의 비쿠계율을 지키는 것이 무척 힘들겠지요.
그러나 아주 소수이지만,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
무늬만 승복을 걸친 것이 아닌...절절한 보리심으로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서 수행을 하고..... 다시 여기서 전법을 하고... 수행할 때면 다시 오지로 돌아가서 수행하고.......
그런 존경할만한 비쿠들이...극히 소수이지만,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런 비쿠들이 있기에 남방 일부에서 불교의 맥이 지켜져 온 것이기도 합니다.......

수행승들은 선정보다도, 열반보다도..... 우선은 사띠. 특히 일상에서의 사띠의 중요함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선정이나 열반을 원하지만... 그 조건을 갖추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님 주장대로 연꽃님이 초기불교 주장한다고 다 초기불교가 아니듯이... 님처럼 초기불교 경안 찾으면서, 사띠 수행 같은 것은 안하겠다고 하고... 대승보살 수행을 초기불교 수행인양 희안하게 합리화시키는 주장한다고 다 초기불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오십보 백보라는 겁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한테 뭐라고 한다는 속담도 있습니다만.....

왜 불교를 믿을까?..... 의아합니다.
교회나 성당가면 님이 생각하는 그런 보살행과 비슷한 일 많이 합니다.

불교종단에 뭔 일 터지면, 순수한 불자들은 창피하다고까지 합니다.
중놈들이 술 처먹었네, 음주 운전했네, 도박했네, 비리를 저질렀네, 축재를 했네, 종단 권력 다툼으로 쌈박질을 했네...하고 방송 나오면..... 어디 봉사가서 무료로 봉사하는데도 불자라는게 그리 창피 할 수 없다고 합니다..........그 중들은 왜 그럴까요?.....붓다가 가르친 8정도 수행...그 중에서 사띠 수행만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 여담으로 해두지요.
가끔 주말이면 산책을 갑니다.....산책반, 경행반이지요

몸이 불편한 노인네들, 중풍 걸린 노인네들이 운동하러 나오는 것을 봅니다.
난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단순히 걷지 말고... 이런 식으로 걸어보면, 즉 걷는 동작을 사띠하면서 걷는... 행선의 기본을 가르쳐주면... 치매예방도 되고 산책하는 운동도 재미있게 느껴지고, 정신도 집중력이 쎄져서 좋아지고, 죽을 때도 정신 차리고 있어서 천국이나 극락 갈 수 있다고 뻥치면서 가르쳐주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보살도 수행을 중요시 하는 님한테... 님의 목숨이 한 달 남았다고 하면, 그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중요합니까?........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간사한 겁니다.....어디로 튈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띠를 하는 겁니다.......마음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시겠습니까?.....
(J)

.
4) “수행은 출가한 비구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자비행과 보살행의 실천만으로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이루었던 붓다의 자세한 설법(법을 설명함)
업의 법칙과 윤리에 대한 가르침
마음을 단련시키는 법
지혜를 닦는(계발하는) 법 등.................

님이 이야기하는 현실생활에서의 자비행과 보살행은... 불법佛法 중에서 극히 일부분적인 윤리 실천에 대한 가르침 정도에 속한다.

담마(法)의 샘물을 떠먹는 국자는 두 가지의 큰 분류가 있다.
그것은 가르침의 학습과 수행법의 훈련... 즉 교학과 수행이란 두 가지란 큰 범주이다.

님이 말하는 현실생활에서의 자비행과 보살행의 지나친 강조, 즉 생활불교..참여불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수행을 출가승에게만 국한시키고, 재가자에게 수행을 등한시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재가자가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는... 불교를 공부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재가자 역시 수행을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한다..... 경전이란 문자만을 통한 공부가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이란 교과서를 가지고 실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가장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실수행이 바로... 몸과 마음에 대한 사띠 수행이다.

님의 주장은 결국... 재가자에게 담마(法)의 샘물을 몸과 마음으로 떠먹으며 공부하게 하는 실수행을 경시하게 하거나 등한시 하게 하고... 재가자에게 있어서 실수행을 장롱 속에 처넣게 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담마(法)의 샘물을 떠먹는 것은........
경전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생활에서 자비행과 보살행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재가자에게도 가르침의 학습(교학)과 수행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이것이 함께 할 때, 현실생활에서도 교학과 수행이 자연스럽게 함께 실천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님의 말대로, '힌두가 보든, 불교가 보든... 바다는 같은 바다로서 존재한다....바다는 우리의 믿음, 종교 여부와 관계없이... 바다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심층적인 관찰(통찰)과 사유를 통해 조사와 점검을 마친 후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힌두는 힌두의 색안경을 쓰고 원래 있던 바다를 바다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붓다의 가르침은 여실지견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그래서 8정도 수행을 실천해서... 궁극에는 붓다처럼 색안경 없이 여실지견해서... 바다를 바다로 여실히(있는 그대로) 알고(知) 보게(見) 되는 것이다.......

붓다 생존 시에도 니칸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라는 자이나교 교주가 깨달았다고 주장했다....그 깨달음에 대해서 붓다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삼명경에서도, 요기(요가) 수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한다.
힌두는 진아를 이야기하고...선불교에서도 진아, 참나를 이야기한다.
힌두는 아트만이 브라만과 합일되는 상태를... 해탈한 상태, 깨달은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다 깨달음은 깨달음인데... 여실지견한 붓다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이 같은 바다를 주장하더라도..... '색안경을 쓰고 본 바다와 여실지견한 바다'...힌두의 바다와 불교의 바다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가 붓다가 설한 경전을 공부하고... 붓다가 가르친 방법에 의해서 수행을 하는 이유가... 붓다의 깨달음에 접근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소중히 하는 초기불교, 즉 상좌부불교는... 그래서 원천적으로 경전의 가필, 첨삭, 삭제 등의 훼손을 말할 수 없는 위법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순수한 붓다의 원음 외에 많은 것들이 첨삭되었지만... 그래도 붓다의 원음을 보호하려는 테라와다의 소중한 원칙과 전통이 없었다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니까야, 붓다의 말씀을 빠알리어(붓다가 활동하셨던 갠지스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 중 하나)로 기록한 경장(경전 모음)’은 없어졌을 것이다..... 중국에 남겨진 아가마(니까야를 산스트리트어로 옮겨 기록한 경장), 즉 아가마를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아함경과 비교할 때도 니까야와 많이 다르게 기록되어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붓다의 원음을 보호하고 지키고 따르는 것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생명의 무리)은 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떠나, 범천들마저도...아직 수다원과를 이루지 못한 고도의 수행자들마저도... 그러한 인식의 전도로 존재에 대한, 진리에 대한 견해의 전도로 이어져 올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예들이 니까야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초기불교가 자비행, 보살행의 실천에 의한 현실불교, 참여불교다...라고 주장 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님의 말대로... 예전에 현실에서 열심히 불쌍한 이들을 구제했던 경주 최부자 역시... 현실 속에서 남을 도와주는 공덕만으로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는 작은 계기도 만들 수 없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교과서로 삼아서 하는 수행이다.

수행은 출가한 비구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세속인들에게.....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수행이란 정신적 훈련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불법佛法은 교학과 수행이란 두 개의 축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축은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재가자에게..... 더욱 절실히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남방의 유명한 고승들, 특히 그 나라에서는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최고지위를 얻었다고 칭송받는 비쿠들이... 재가자에게 법문을 한 후에 재가자의 수행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이유이다.......

말씀의 종교, 현실불교, 생활불교, 자비행과 보살행에 만족하자 등등......이는 매우 근시안적이고 협소한 시각이다.
불법佛法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재가자도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
정법正法(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J)
--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글

중복되는 내용도 많이 있지만,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수행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한국불교의 한계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인터넷 논객의 실상과 한계에 대하여 여실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몇 번이고 읽어서 가슴에 새겨두고 8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특히 일상생활에서의 사띠 수행에 참조할 귀중한 자료라 본다.

출처 : 진흙속의연꽃 포스팅(http://blog.daum.net/bolee591/16156243)을 일부 수정 보완
작성일:2018-04-14 13:28:00 119.64.23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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