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버팔로시에 있는 뉴욕 대학에 재학중이던 18세의 한 젊은 여대생은 혼란과 불행과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춘기적인 고민을 넘어 성인이 되어가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 때 명상을 한다면 이러한 혼란과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지 않을까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평소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기 위해서 인도로 향했다. 그녀의 이름은 샤론 살스버그(Sharon Salzberg, 1953~)였고, 자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수행지도자가 되었다. 인도에서 처음 접한 불교는 달라이 라마께서 계시던 다람살라였다. 그곳에서 티베트 스님들에게 불교를
사념처-팔정도-위파사나 입각한 차 명상 강의 지난 2004년 9월에 화순 운주사에서 열린 제 6회 초의차문화연구원 들차회에서 (사)초의차명상원 원장 지장 스님이 차 시연을 하고 있다. 차와 명상을 결합한 차 명상원이 서울 종로에 문을 연다. 일지암 주지 여연 스님이 이사장, 군법사로 10년간 활동해온 지장 스님이 원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초의차명상원이 바로 그 곳이다. 종로 두산위브 2층에 위치, 11월 8일 개원하는 사단법인 초의차명상원은 차 전문인을 키워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지쳐 있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차를 통한 명상을 통해 심신의 안락은 물론 작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수행종합공간으로 꾸려진 30여 평 규모의 명상원은 다실과 강의실로 구성돼 있으며,
정형남 지음 / 비전코리아 ‘차’를 소재로 한 역사 구도 소설『천년의 찻씨 한알』은 천년 동안 숨겨진 차의 전통성과 그 안에 녹아있는 정신의 혼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구도소설이다. ‘차’를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천년의 찻씨 한알』은 일반상식을 넘어 우리 선조들의 기품과 품위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단번에 느낄 수 있게 만드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재미와 즐거움을 더 해 준다. 작가는 천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차’의 역사와 유래를 소설 속 화자인 ‘지장스님’ 을 통해 그 시대적 배경과 당시의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간다. 또 ‘차’의 역사와 많은 자료들을 기초로 한 탄탄한 구성은 차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설 ‘남도’로 제1회 채만식 문학상을
예선사들의 차와 선의 깊은 인연에 관한 화두를 명쾌하고 쉽게 풀어낸 혜봉 스님의 『차茶와 선禪 그리고 화두話頭』는 차문화이 변천사를 약술하고 선과 차의 관련성, 차 화두 현황 등에 관해 서술한 책이다. 또 선의 황금시대인 당·송의 5가 7종(五家七宗)에 이르는 선종사(禪宗史) 전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차와 관련된 화두들을 낱낱이 발췌해 문헌별로 자료집을 만들어 그것을 바탕으로 집필한 이 책은 차문화와 선의 진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구성해 청풍납자와 다인은 물론 차와 선에 관심 있는 불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혜봉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차와 관련된 화두가 ‘끽다거’만이 아님에도 유독 끽다거 화두가 운위되며 본래 의미보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끽다거’에 대한 일
‘나무아미타불’이 번뇌 없애는 묘약 남편도 교도소서 열심히 염불-사경 친정어머니와 언니 혜명화님의 손에 이끌려서 가게 된 경주 미타사는 고향집처럼 푸근하고 따뜻하며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곳이었다.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의 법장 큰스님께서는 출가하신 후 수십 년을 정토수행을 해오셨고, 칠순을 넘긴 연세에도 하루 두 끼 식사와 세 시간만 주무시며 늘 용맹정진 하셨다. 또 주지 백련 스님은 하얀 연꽃처럼 맑은 미소로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법문을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신도들 수는 많지 않았지만 기복이나 놀러오는 곳이 아닌, 아미타부처님께 믿음으로 의지하고 불교공부를 하기 위한 곳으로 대구, 부산, 전주, 남원, 울산, 김해, 마산, 의정부 등 각처에서 오셨다. 부도가 난 처음 몇 달은 신경성 스트레스로
남편 부도-가정 풍비박산 나며 발심 자존심-배신감 버리고 ‘나무아미타불’ 누가 장난 같은 세상이라고 했던가.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남편은 누구보다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남편과 나는 중매로 만났다. 당시 나는 교회에 다녔는데 한 집사님이 좋은 사람 있다고 소개해 준 사람이 나중에 알고보니 독실한 불교집안이었던 지금의 남편이었다. 화살보다 빠른 게 세월이라고 했던가. 종교는 뒷전으로 하고 아이들 치다꺼리에, 사업하는 남편 내조하기에 정신없이 바빠하며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어느날 갑자기 남편 사업이 어려워졌고 결국 부도가 나기에 이르렀다. 형사들과 피해자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괴로웠던 남편은 그만 집을 나가 버렸다. 이에
작년 법보신문(770호, 773호)에 두 차례, 태국의 선지식 아찬 붓다다사 스님(1906~1993)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분은 아찬 붓다다사의 제자이며, 통역/번역자였던 산티카로(Santikaro) 법사이다. 오는 10월 30일 근본불교 수행도량 홍원사의 국제불교학술대회와 집중수행지도차 한국에 오는 인연도 있어서 우리에게는 아찬 붓다다사스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산티카로 법사를 소개한다. 산티카로 법사는 남녀평등, 민주적인 운영, 사회참여적인 불교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1985년 태국서 출가 산티카로 법사의 본명은 로버트 라슨(Robert Larson)이며, 1957년, (남방상좌불교의 불기 2500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1980년 수사학 전공으로 일
경산 스님은 유점사에서 수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정진했다. 치열했던 불교정화운동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이 새롭게 태어난 이후 1963년, 1973년. 그리고 1979년 세 번에 걸쳐 총무원장에 오른 스님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경산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1917년 6월 21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 193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홍수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고 1945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1956년 정화불사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2년에는 ‘재단법인 동국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후 세 번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맡아 대한불교조계종단의 기틀을 탄탄히 다져놓고 1979년 12월 25일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홀연 열반
선원생활은 나를 담금질 한 시간 참선후 우유부단-열등감 사라져 선원생활은 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선원에 와서 선사님께 자신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도반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 중 언뜻언뜻 내 어두움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드러나 머리를 쳤다. 또 무심코 내뱉는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잘못 살고 있는 증거가 드러나고 그것을 내 눈으로 내 귀로 직접 보고 듣게 되었다.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뼈아픈 참회로 이어졌다. 전부 다 내 탓이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주위의 아픔은 모른 체 자기 연민에만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내 과거가 뼈에 사무치도록 부끄러웠다. 주위의 인연들에게 참 미안했다. 특히 휘둘려 사느라 편안한
잭 콘필드는 동남아시아에서 10여 년간의 긴 출가수행을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정서적인 문제들(비난하는 경향, 두려움, 인정과 거부 등의 심리상태)을 교정하고, 인관관계를 맺는 방식을 자각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법과 인간관계의 강한 힘을 통해 배워가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시작했다. 한 때는 출가 수행자였던 잭은 승복을 벗고 이제 집단 치료와 개인 치료를 통해서 그리고 가슴을 중시하는 명상과 자아초월 심리학과 때로는 성공적이지만 때로는 괴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치유의 과정을 밟아갔다. 잭은 먼저 자기 가족사와 어릴 때의 경험을 검토하고, 현재의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검토하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현재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과의 어려웠던 관계의
열심히 살았지만 늘 허탈-괴로움 교직원연수를 계기로 불교에 눈떠 과거의 집착과 탐욕 때문에 생긴 고집에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고 그로부터 생긴 상처가 어둠이 되었다. 그 어둠 속에서의 시간은 고달픈 여정이 되고…. 언제부터인가 내 내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내면의 어두움은 늘 나와 함께 했다. 그전에 학교 다닐 때에도, 결혼하고 나서도 이 어두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왜 우리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 책도 뒤지고 생각도 했지만 시원하게 알지 못해 ‘고통이란 해답이 없고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단념해 버리고 지냈다. 결혼 후 아이를 갖고 낳는 일이 나에게는 참 힘들었다.
無知 알면서 탐욕-성냄 줄어 ‘게으르지 말자’ 다짐하며 정진 수행이 깊어질수록 들뜬 마음은 가라앉고 호흡과 마음을 주시하게 되니 조금씩 선정의 단계를 접하게 됐다. 슬픔이 오면 슬픔이 오는구나.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이 오는구나.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집착은 조금씩 소멸돼 갔고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망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욕망과 갈망, 즐거움으로 깨어나지 못했던 한 중생이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이 깨어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게 되었고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일들이 얼마나 무한히 평화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에서 호두마을을 찾은 도반은 모두 5명. 우리 다섯 도반은 당시 누구하나 모자람 없이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였다. 3개월 뒤 회향식은 봉행됐고 은사 스님은 우리들에게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