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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의 책이야기-예루살렘 입성기

기자명 김호성
  • 사설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성서의 불교적 읽기

문헌비평에 큰 비중...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위해 저술

민영규 지음
연세대 출판부

온 몸을 털로 덮고 머리에 뿔을 인마소의 길을 걷는다.
-조흥윤, <사천강단 발문〉

《예루살렘입성기》는 1965년부터 2년에 걸쳐서 연세대학교의 학보 `연세춘추'에 연재한 것인데, 1976년 연세대 출판부가 `대학문고'의 하나로 출판하였던 책이다. 서여 민영규(西餘 閔泳珪)선생의 문집으로 출판된 《사천강단(四川講壇)》(우반 펴냄)에 다시 수록된 것이 1994년의 일이다. 연세대 출판부에서 나온 《예루살렘입성기》에는 서여선생의 글에 대한 연세대 신학과 김찬국(金燦國)˙지동식(池東植) 두 교수의 비평까지 함께 실려 있었으나, 《사천강단》에는 지동식 교수의 글만 실려있다. 여기서는 쉽게 구할수 있고, 독서하기 편하다는 점에서 《사천강단》 수록본을 이용키로 한다.

불교실학(佛敎實學)의 길
"불교책 이야기를 하면서, 왜 하필 《예루살렘입성기》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서여 민영규 선생의 학풍을 이해해야 한다. 민영규 선생의 학문세계는 `서여학풍(西餘學風)'이라 불러서 좋을만한 깊고 넓은 세계를 갖추고 있다. 그럼, 서여학풍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서여선생에게 영향을 미친 스승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서여선생의 수많은 스승 중 정인보(鄭寅普)˙시취경휘(矢吹慶輝)˙호적(胡適) 등의 특별한 영향을 나는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념적인 차원에서 실(實)이다. 실은 실학(實學)을 의미한다. 서여선생의 논문 <위당 정인보 선생의 행장에 나타난 몇가지 문제-實學原始-〉는 역사학계 일반에 널리 퍼져있는 정치경제적 실학 개념을 양명학(陽明學)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실학과 양명학은 그 근본에서 둘이 아니니, 실학은 바로 위당(爲堂)에게로 이어지는 조선조 후기 양명학의 전통-이를 서여선생은 江華學이라 부르는 것이다-에 잇대어 있는 것으로 서여선생은 보고 있다. 삼계교(三階敎, 삼계교 연구의 개척자가 바로 시취경휘이다)와 결사운동을 비롯한 넓고도 깊은 불교사 연구는 바로 불교의 역사 안에서 실학적 자취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있었으나, 잃어버렸던 실(實)을 되살리려는 비원(悲願)을 서여선생은 학문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방법론적 차원에서 사(史)이다. 이때 사(史)는 역사적 방법론을 말한다. 선(禪)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영목대졸(鈴木大拙)에 상대한 호적의 입장이 있음을 상기할 때, 그는 역사적 방법론에 입각한 호적을 지지한다. 그에게 역사는 묻혀진 `진실을 들추는'(206쪽) 일이다. 실학의 길과 역사의 길은 서여선생의 길이었다. 서여선생이 찾고자 했던 그 길을 나는 `불교실학의 길'로 부르고자 한다. 그런 뜻에서, 서여학풍은 불교실학의 추구라고 보아서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해(死海)와 돈황(敦煌)
성서를 깊이 연구하지 못한 나에게 《예루살렘입성기》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독자의 인욕바라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입성기》가 보통의 기행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서여선생은 1964년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그때의 일을 적은 것이 《예루살렘입성기》이므로 기행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느 여행기와는 다르다. 우선, 현지의 실사(實査)를 통해서 복음서(福音書)의 내용을 확인˙검토˙재구성한다. 답사의 체험담보다 문헌비평이 더욱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하여튼, 현지답사와 문헌비평의 방법론은 90년대에 이룩한 《사천강단》에까지 이어지는 학적 태도이다.

《예루살렘입성기》에 대한 지동식교수의 비평은 첫째로 성서에 대한 역사적독서는 옳지 않다는 점에 맞추어져 있었다. 지동식교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신약성서의 저작자들은 결코 불교도도 아니요, 철학도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그러기에 신약성서에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읽어야 되고 종교 일반의 역사보다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Heilsgeschichte)를 읽어야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 자체가 거기에 대한 증언이니까."(262쪽) 지교수의 입장은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책읽기를 모두에게 다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서여선생에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게 하거나 역사의 공백(空白)을메꾸어줄 새로운 자료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보다 한 시대 앞선 엣센 종파의 움직임을 직접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 쿰란의 사해문서라면, 수(隋)˙당(唐)시대 삼계교도(三階敎徒)의 소식을 직접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 곧 돈황문서이기도 하다. …중략… 더욱 신기해 마지않는 것은 엣센과 삼계교가 한결같이 극한적인 종말관에 입각해서 혁명적인 종교운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삼계불법의 술어를 빌리면 그것을 말법관 또는 말법사상이라 부른다."(224쪽)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기독교의 기원을 엣센 종파와 관련시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서여선생 역시 이 견해를 지지한다. 예수는 엣센 종파의 흐름을이었으면서도 출세간적 공동체운동이었던 엣센 종파에만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일탈하여 그리스도가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찬국교수는 `엣센종파 출신설'에 대한 반대의견을 소개하면서 간접적으로 비판(연세대 출판부판, 163~176쪽 참조)하고 있으나, 문외한인 나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서여선생의 관점에 대한 신학적 평가 여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출세간적 결사공동체인 엣센 종파에 머물지 않고 (혹은 엣센 종파와는 달리) 민중들 사이에서 이타행(利他行)을 행해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서여선생의 관심을 읽어야 할 것이다. 서여선생은 `예수 사건'과 삼계교를 비교하고 있는 바, 깨달음(=자기구원)에는 전혀 관심없이 오직 `홍익인간'(弘益人間, 단군신화의 이 말이 삼계교의 문헌에서 나오는 말임을 서여선생은 나에게 직접 책을 펴고 가르쳐 주신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一然이 삼계교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서여선생은 추정하는지도 모르겠다.)만을 실천하고자 했던 삼계교의 이념을 예수에게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서여선생의 성서 읽기는 성서에 대한 불교(=삼계교)적 읽기라 보아서 좋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독백이냐, 대화냐
이 책은 "기독교와 불교와의 사이에 대화의 광장을 마련해 본다는 것"(247쪽)을 목적으로 쓰여졌다. 지동식 교수는 일곱 번에 걸쳐서 비평문을 `연세춘추'에 게재하였다. [《사천강단》 수록본은 이 비평문을 서여선생의 글과 구별하려는 어떤 장치도 해놓지 않았다. `지동식'이라는 이름도 생략하고 마는 결례를 범하고 있다.] 지교수의 비평 중 `역사적 성서 읽기'에 대한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불교는 독백이고 기독교는 대화라고 하는 분리하는 관점이 문제다. "불교에는 본시 사색과 명상을 통한 `깨달음'과 `앎'의 세계는 풍부하지만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치는 `만남'과 `사귐'의 세계라든지 `화해'의 세계는 희박한 듯하다."(271쪽)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서여선생의 대답은 마틴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만남은 기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284쪽)

이에 더하여, 나로서는 지교수가 `손가락과 달의 비유'를 오해하고 있음만 지적하기로 한다. 달은 깨달음을, 손가락은 언어를 가리킨다. 따라서, `손가락과 달의 비유'에는 달을 보기 위해서는 손가락이 필요하다는 차원이 있음도 사실이다. 이때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야말로 만남˙사귐˙화해의 도구가 아닌가. 깨달음을 얻고자 함에 있어서 스승(=禪師)들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상기해 보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한 깨달음의 길, 그것이 선(선)의 길인 것이다. 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야말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만남이나 신과 인간의 만남보다 더 구체적인 살아있는 만남이 아니겠는가.


김호성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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