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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도박사건 등 난관 정치력·뚝심으로 돌파

  • 교계
  • 입력 2017.10.26 21:23
  • 수정 2017.10.30 16:59
  • 댓글 39

주요 사건으로 본 자승 스님 8년

8년 임기 채운 첫 총무원장
봉은사 직영전환 사태로 주춤
일부 스님들 일탈로 가시밭길
민노총 위원장 조계사 피신에
‘스님 한 수’라는 중재력 발휘
사회약자 위한 행보 높은 평가

 조계종 사상 처음으로 총무원장을 재임한 자승 스님이 10월30일 퇴임했다.
조계종 제33․34대 총무원 집행부를 이끌었던 자승 스님이 10월30일 공식 퇴임했다. 이로써 자승 스님은 1962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8년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총무원장으로 기록됐다. 역대 총무원장의 평균 임기가 1년 10개월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자승 스님의 임기 8년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종단 권력을 둘러싸고 이어진 반목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종단 안정화의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승 스님이 8년의 임기를 채우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승 스님은 특유의 정치력과 인욕으로 자신 앞에 놓인 난제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33대 총무원장 당선=2009년 10월 제33대 총무원장에 당선된 자승 스님에 대한 종단 안팎의 시각은 극명하게 갈렸다. 전임 총무원장 지관 스님에 비해 20여년 젊은 50대 총무원장이라는 점에서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종단의 산적한 과제를 풀어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경험부족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자승 스님은 2009년 10월 33대 총무원장 취임식 전날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 때문인지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과 동시에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특히 ‘소통과 화합’을 내세운 자승 스님은 공식 취임식 하루 전날 서울 용산참사 현장을 전격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진실규명을 약속했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 논리가 빚은 참사였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사태의 책임을 유가족들에게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이 용산참사 현장을 찾은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자승 스님은 또 총무원 집행부 구성에 있어서도 파격을 이어갔다. 역대 총무원장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종책모임 계파를 중심으로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반대 계파와 뚜렷한 여야 구도를 형성했다. 그러나 자승 스님은 각 종책모임의 추천을 받아 첫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장기간 지속된 여야 대립구도를 해소했다. 일각에서는 ‘계파 간 배분’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소모적 갈등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으로 논란이 커지자 조계종 화쟁위는 토론회를 열어 종단과 봉은사 측 입장을 중재했다.
◆봉은사 직영전환 사태=순탄하게 연착륙하던 33대 집행부가 2010년 3월 중앙종회를 앞두고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총무원 집행부는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해 강북의 조계사와 강남의 봉은사를 중심으로 서울 도심포교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중앙종회도 취지에 공감해 가결함으로써 봉은사 직영전환이 확정됐다.

그러나 봉은사 주지였던 명진 스님은 주지 연임이 불확실하게 되자 강하게 반발했다. 명진 스님은 “봉은사 직영 배경에 당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외압이 있었다”고 주장해 논란이 확산됐다. 특히 명진 스님이 봉은사 일요법회 때마다 쏟아내는 독설로 종단의 위상은 크게 훼손됐다. 명진 스님과 총무원 집행부 간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결국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중재에 나서면서 1년 가까이 지속되던 봉은사 직영사태 논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명진 스님과의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봉은사가 직영사찰로 전환되면서 사찰 예산은 크게 증가했고, 신도시 포교 등 종단 목적사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사찰 주지와 신도 등으로부터 충분한 공감대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봉은사 직영전환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에 반발해 조계종은 낙단보에서 민족문화수호결의대회를 개최했다.
◆템플스테이 예산삭감=2010년 12월 정부여당이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하면서 불교계에 지원되던 템플스테이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예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템플스테이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한 결과였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자는 취지로 정부의 요청으로 추진됐던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템플스테이 예산을 불교계에 대한 특혜, 혹은 ‘선심성 예산’인 것처럼 호도했다. 이 문제는 ‘젊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에 대한 첫 시험대가 됐다.

자승 스님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자승 스님은 “정부로부터 받는 문화재관련 예산 등을 모두 반납하고, 더 이상 정부 예산에 발목이 잡혀 끌려 다니지 않겠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종단이 쇄신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교구본사를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의 ‘민족문화홀대’를 규탄하는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는 등 정부와 대척점에 섰다.

조계종의 강경 대응에 당황한 정부는 곧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예산 복원을 밝혔다. 또 전통문화 보존계승 정책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정부의 거듭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으로 1년 가까이 진행되던 조계종의 민족문화수호 운동도 일단락됐다. 이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이 개선된 것은 성과였지만 ‘정부예산의 고리’를 끊겠다는 조계종의 결의가 지속되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지적도 있다.

 백양사에서 발생한 도박사건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자승 스님을 비롯한 종단 집행부는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고 100일간 108참회정진을 진행했다.
◆백양사 도박사건=2012년 5월 백양사 전 방장 수산 스님의 49재를 앞두고 한 호텔에서 서울 조계사 주지 등이 포함된 일부스님들이 술과 담배를 든 채 ‘포커’를 치는 장면이 공개돼 큰 파장이 일었다. 일반 언론까지 가세해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조계종에 대한 비판은 겉잡을 수없이 확산됐다.

일부스님들의 일탈행위였지만 그 책임은 고스란히 총무원 집행부로 향했다. 이런 가운데 사태를 수습해야 할 총무원 부실장들이 일괄 사표를 내고 떠나면서 모든 책임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몫으로 남겨졌다. 자승 스님으로서는 최대 위기였다.

자승 스님은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고 “종단의 책임자로서 불교를 아끼는 국민과 불자들에게 심려와 허탈감을 드린 것에 대해 깊이 참회한다”고 밝혔다. 이어 종단 차원에서 자성과 쇄신결사를 추진해 종단을 혁신할 것도 약속했다. 비록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은 아니었지만 종단 대표자로서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근래 백양사 도박사건의 일부 주역들이 현 총무원장에 대해 적폐인양 몰아붙인 것은  아이러니다.

 자승 스님이 제34대 총무원장에 당선돼 중앙선관위원장으로부터 당선증을 받고 있다.
◆험난했던 재임=2013년 8월, 제34대 총무원장 선거가 50여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이렇다 할 후보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자승 스님이 “재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등 모호한 발언으로 출마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33대 총무원 집행부를 구성했던 종책모임 무차․무량․보림회 소속 스님들이 호주 순방길에 나선 자승 스님의 공백을 틈타 보선 스님을 후보로 추대하면서 급격히 선거 국면으로 전환됐다. 그러자 자승 스님도 귀국과 동시에 “선거로 종단구성원들에게 평가를 받겠다”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이 무렵 종단 안팎의 사정은 자승 스님이 재임을 낙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종단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중진급 스님들이 대거 보선 스님 지지를 선언한 데다 전국수좌회 소속의 일부스님들까지 총무원 청사 앞에서 ‘자승 스님 재임 반대’를 요구하는 등 부정적인 여론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승 스님은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의 출마에 강하게 반발했던 수좌회가 제시한 “차기 총무원장을 제도권과 비제도권 스님으로 구성된 총무원장추대위원회에서 선출하되, 출마를 예정한 스님들은 모두 자진 사퇴한다”는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그러나 당선에 자신감을 내비췄던 보선 스님 측은 끝내 수좌회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수좌회가 제안한 총무원장 선출논의는 무산됐다. 이에 따라 자승 스님과 대척점에 섰던 수좌회도 ‘재임반대’의 명분을 잃게 됐다.

결국 자승 스님과 보선 스님은 선거를 진행했다. 그 결과 자승 스님은 예상을 깨고 50표(179표 대 129표)차이로 제34대 총무원장으로 당선됐다. 자승 스님의 승부수가 부른 결과였다.

 자승 스님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진도 팽목항에 임시법당을 세우고 종단 스님을 파견해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자승 스님은 재임기간 내내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돌보는 대사회활동을 지속했다.
◆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등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00여명이 사망한 이 사건으로 유가족 뿐 아니라 국민들은 침통과 울분을 삭혀야 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자승 스님은 진도 팽목항에 임시법당을 세우고 종단 스님을 파견해 유가족들을 위로하게 했다. 이어 팽목항을 직접 찾아 희생자의 극락왕생과 실종자 귀환을 발원했다. 또 서울 조계사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법회를 열어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조계종의 자비심에 유가족들도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자승 스님은 이후에도 저소득 가정과 소외계층을 위한 대사회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특히 2012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제를 계기로 출범한 사회노동위원회와 함께 노동자, 청소년,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감싸 안는 활동을 지속하면서 사회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불교 이미지를 크게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국대 사태=자승 스님이 34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종단은 안정을 되찾았다. 교구분권화․승려노후복지 등 종단의 중장기 사업도 착실히 진행됐다. 대사회 자비나눔 활동도 꾸준히 진행되면서 종단 안팎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2014년 12월 동국대 총장 선출 문제로 조계종은 또 한 번 큰 홍역을 치렀다.

이 무렵 총장 재임을 노리던 김희옥 전 총장이 돌연 사퇴한 배경에 자승 스님의 강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희옥 총장이 출마포기를 선언할 당시 자승 스님과 동국대 이사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호계원장 등과 만났다는 사실도 폭로됐다. 그러자 동국대 교수회와 학생, 일부 단체들이 가세해 ‘총무원장의 외압’을 주장하며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승 스님은 기자들과 만나 “동국대 이사들은 이미 다른 분을 총장으로 선출하려는 분위기였다. 김희옥 총장은 4년 전 동국대가 어려울 때 종단이 나서 모셔온 분인데, 이사회 내부의 분위기를 미리 전해주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부 단체들은 동국대 이사스님들의 수십 년 전 행적까지 들추는 등 ‘신상털기’에 나서면서 동국대와 종단의 위상은 급격히 실추됐다.

이런 가운데 용주사 주지스님의 범계의혹과 마곡사 금권선거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자승 스님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사건 역시 자승 스님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었지만, 관련 의혹에 대해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총무원장으로서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승 스님은 경찰에 자진출두를 결심한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에게 자신이 걸고 있던 염주를 건네며 건강을 기원했다.
◆한상균 위원장 조계사 피신=2015년 11월 총파업과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 조계종은 한 위원장의 요청을 수용해 그를 조계사에 머무르도록 허락했다. 또 조계종 화쟁위는 정부와 경찰에 대화로 해결할 것을 요청하는 등 중재에 나섰다.

이러는 사이 조계사는 진보와 보수단체들의 대립의 장이 됐다. 연일 진보․보수단체들의 집회가 이어져 혼란이 계속됐다. 경찰도 조계종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계사에 병력을 투입해 한 위원장을 강제 연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에 총무원 및 조계사 스님과 종무원들은 맨몸으로라도 경찰 진입을 막겠다고 맞섰다. 경찰이 끝내 병력을 투입하면서 조계사 곳곳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그 순간 자승 스님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경찰과 민주노총은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종단의 노력을 지켜 봐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한 위원장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유보했고, 한 위원장도 경찰에 자진 출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승 스님의 중재는 경찰에게는 법집행의 명분을, 한 위원장에게는 노동자의 대표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진보와 보수언론을 막론하고 대다수 언론은 ‘자승 스님의 절묘한 한수’라고 대서특필했다.

자승 스님의 지난 8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중도에 하차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승 스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 8년을 꼿꼿이 지켰다. 자승 스님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13호 / 2017년 1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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